서울서체의 렉시테크 특허권 침해 근거

아... 어렵다.

서울시가 제작한 한강체와 남산체(이하 서울체라 함)가 본 특허권자의 특허사항을 침해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총론적인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림1-1)고정폭 폰트(MS굴림과 MS바탕)의 글줄길이 비교


그림1-2)가변폭 폰트(우리바탕과 서울 한강체)의 글줄길이 비교


그림1-3)가변폭 폰트(우리돋움과 서울 남산체)의 글줄길이 비교


우선 그림1-1을 통해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림1-1에서 한글 폰트들로 대표되는 MS바탕과 MS굴림은 한글 완성형 고정폭 폰트들입니다. 글자의 크기(일반적으로 높이의 사이즈임)가 50pt(point: 1point=0.3514mm)일 때, 10개 글자의 길이는 500pt가 됩니다. 만약 ‘조선일보명조’처럼 폭이 글자높이의 91%를 가지는 장체형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아래의 그림2에서 보듯이 모든 글자가 일정하게 폭이 즐어든 고정폭으로 만들어집니다.

그림2) 장체형 고정폭 폰트(조선일보명조)의 글줄길이 비교


본 특허권에 의해서 만들어진 우리바탕체(그림1-2)와 우리돋움체(그림1-3)는 그림1-1과는 달리 같은 글자의 수임에도 글줄길이가 많이 달라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서울체의 한강체(그림1-2)와 남산체(그림1-3)도 특허권에 준하여 만들어진 우리바탕체와 우리돋움체와 거의 비슷하게 만들어져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서울체들이 조선일보명조처럼 모든 글자들을 장체형으로 줄여서 만들어졌는가, 아니면 본 특허권 청구항 1항과 11, 12항을 도용하여 만들어졌는가라고 하겠습니다.

그림3-1) 남산체 ‘ㅏ’모음으로 이루어지는 받침없는 글자


그림3-2) 남산체 ‘ㅏ’모음으로 이루어지는 받침있는 글자 : 받침과 관계없이 900으로 같음을 알 수 있다.


그림3-1과 그림3-2는 폰트제작프로그램을 통하여 열어본 ‘ㅏ’모음을 가지는 남산체 글자의 너비들을 표시한 상태를 캡쳐한 것입니다. 여기서 ‘ㅏ’모음을 가지는 글자들은 하나같이 900이란 유니트(unit)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어도비사에서 정립된 폰트는 한 글자를 1000개의 유니트로 하고 있는데(마이크로소프트는 1024, 혹은 2048unit를 사용하고 있음), 굴림이나 바탕처럼 높이의 100%가 아닌 90%를 각 글자의 너비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읍니다. 이로써 서울체는 초성과 관계없이 중성(즉 모음)에 의하여 글자의 폭을 가지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중성(모음)이 다를 경우에도 각 글자의 폭이 900unit로 같다면 서울체는 본 특허권을 침해했다고 볼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앞서나온 그림1-2의 한강체의 “기니디리...”로 이어지는 10개의 글자를 보시면 그 글자들은 ‘ㅏ’모음으로 이루어진 “가나다라...” 의 글자와는 그 글줄길이가 심하게 차이가 나게 작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림4-1에서 ‘ㅣ’모음으로 이루어지는 글자는 850unit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으며, 이것은 본 특허권의 1항과 11항을 도용하고 침해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림4-1) 한강체 ‘ㅣ’ 모음의 글자폭 도해
: 검정색 선과 수치는 글자의 upm을 나타내고, 파란색 선과 수치는 그 글자가 갖는 실제의 폭(pitch)를 나타낸다 (아래 그림들도 동일함)


그림4-2) 한강체 ‘ㅏ’ 모음의 글자폭 도해


그림4-3) 한강체 ‘ㅓ’ 모음의 글자폭 도해


그림4-4) 한강체 ‘ㅜ’ 모음의 글자폭 도해


서울체의 남산체도 한강체와 하나도 다름없이 본 특허권을 도용하면서 만들어져 있음을, 상기 한강체와 같은 방식으로 입증할 수 있습니다.

==특허권을 도용, 침해한 동 서체 제작에 참여했던 위원들은 본 특허권자가 1991년에 가변폭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기 때문에, 아마 본 특허는 무효에 해당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 당시의 논문과 본 특허권의 근본적인 차이를 파악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오류라고 할 것입니다.

필자가 당시 월간 디자인지에 썼던 논문의 내용에는 한글 글자들이 수준높은 편집디자인을 위해서 제작되어져야 한다면 가변폭으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며, 그 이유는 자음과 모음의 형태적 특성에서 오는 불필요한 자간의 공간 때문이라는 점을 밝혀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본 특허권의 출원내용은 앞의 논문에서 지적한 불필요한 자간의 공간을 일률적이고 통일적으로 줄이기 위한 조형적 이론에 근거한 방법론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 조형적 이론의 근거는 본 특허권이 인정되고 난 이후 본사의 홍보자료와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하여 발표하였으며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림5) 모음 중심의 완성형 가변폭이 만들어지는 원리의 이론적 배경을 설명한 도해들

: 푸른색은 시각적 값에서 제외되는 물리적 값, 붉은색은 사이드베어링을 의미한다. 사이드베어링에 걸쳐있는 글자의 획은 시각적 값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이를 아웃슈팅이라고 한다. 즉, 아웃슈팅으로 처리한다는 말이다. 이 아웃슈팅 기법에 의하여 초성 자음은 그 형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고정된 공간을 일정하게 자리잡게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본 특허권에 의한 우리바탕, 우리돋움, 우리신문체 등이다. 다시 앞글의 그림4의 서울 한강체 “가”를 보면 앞에서 제시한 논리에 철저히 입각하여 자음을 배치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본 특허권의 이론적 배경마저 철저하게 차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참고자료
렉시테크 한글완성형글꼴처리방법 특허권 1항, 11항, 12항 요약.

원문보기 http://www.lexitech.co.kr/bbs/lexibbs/board.php?bo_table=board_01&wr_id=34&page=

by 달의궁전 | 2008/09/18 18:08 | 트랙백 | 덧글(4)

서울시 서체 특허 논란

디자인 서울...
서울시가 하는 일이란...



서울서체' 특허 침해 논란

서울시가 디자인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공개한 ‘서울서체’ 2종이 특허 침해 공방에 휩싸일 조짐이다.

서체 개발업체인 렉시테크(대표 장주식)는 서울시가 공개한 한강체와 남산체가 자사의 ‘한글 완성형 글꼴처리’ 기법에 대한 특허를 침해했으며, 특허권 침해 행위 중지에 관한 경고장을 서울시 측에 발송했다고 17일 밝혔다.

렉시테크 측은 지난 7월 15일부터 서울시가 무료로 배포하고 있는 서울서체 2종이 ‘ㅏ’ ‘ㅣ’ ‘ㅡ’ 등 모음의 종류에 따라 글자 사이의 피치(자간)를 다르게 적용해 생성하는 자사의 글꼴 처리 특허를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렉시테크의 특허(제657352호)는 컴퓨터 자판이나 휴대폰 등의 문자 입력 버튼을 통해 입력된 한글의 모음 그룹에 따라 서로 다른 피치를 적용해 문자를 생성하는 처리 방법에 관한 것이다. 이전의 서체들이 일률적인 글자 사이의 간격을 적용, 조형미가 떨어지는 단점을 극복한 것이다.

렉시테크 측은 “이 기술은 지난 10여년의 연구 끝에 2006년 특허를 취득했으며, 이 기술을 적용한 다양한 서체를 올 한글날을 기점으로 대대적으로 공개할 예정이었다”며 “서울서체의 특허 침해로 사업화에 난항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 또 “저작권과 이와 연관된 특허 기술이 존중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영세 기업의 사기는 물론이고 존폐의 기반까지 위협받고 있어 유감스럽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서울서체를 공개한 디자인서울총괄본부 측은 “이같은 사항을 민원 차원에서 접수하고 기술 조사 작업을 검토하고 있다”며 “이 기술은 이미 영문 등 다양한 서체에 적용되어 있는 기술로 특허 침해 주장은 잘못된 것”이라고 밝혔다.

[ 전자신문 양종석기자 (jsyang@etnews.co.kr) ]

※기사보기 : http://www.etnews.co.kr/news/detail.html?id=200809170201

by 달의궁전 | 2008/09/18 17:56 | 트랙백 | 덧글(0)

<누명 쓴 사나이> 공포의 작동 기제; 환영으로서의 서스펜스

고다르가 <<카이에 뒤 시네마>>에 쓴 글

스토크 클럽은 널리 알려진 것처럼 뉴욕에서 가장 세련된 만남의 장소이다. 에어컨, 자욱한 시가 연기, 선명한 립스틱... 그러나 크레딧 너머로 차츰 비어가는 실내에 자리한 카메라는 그곳의 스타나 백만장자를 보고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노곤한 블루스를 연주하는 평범한 작은 악단 쪽으로 다가간다. 스토크 클럽은 문을 닫고, 크리스토퍼 발레스테로(헨리 폰다)는 연주를 마치고 더블 베이스를 챙겨 도어맨에게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선다. 이 때 화면의 앵글 때문에, 잠시 두 형사가 그를 따라오는 것처럼 보인다. 잠시. 그러나 다음 순간 형사들은 그의 옆을 지나쳐 앞서 가기 시작한다. 이 쇼트로 히치콕은 발레스트레로를 기다리고 있는 구속과 더불어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게 될 '운명'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각인시킨다.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사나이>의 히치콕에게 심리학은 전혀 관심 밖이다. 중요한 것은 운명의 반전이다. 게임을 즐기고, 언제나 공정하게 게임하는 히치콕은 사실 크레딧이 나오기 전부터 관객에게 경고를 했다. 강렬한 콘트라스트의 조명 속에 그의 땅딸한 실루엣이 나타나 몇 걸음 떼다 멈춘다. 낮고 온건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이 영화는 내 다른 작품과 다릅니다. 서스펜스 같은 건 없습니다. 오직 사실뿐입니다." 그러나 이 말 속엔 또 다른 뜻이 담겨 있다. <누명 쓴 사나이>의 서스펜스는 운명 자체다. 이 영화의 주제는 사건의 예측 불가능함이 아니라 그 가능함, '그럴 수 있음'이다. <누명 쓴 사나이>에서 히치콕은 모든 쇼트, 모든 전환, 모든 화면 구성을 아무런 꾸밈 없이, 철저히 논리적으로 관리한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원하는 것은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다. 

발레스트레로(친구들에겐 '매니'로 불리는)는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 잠을 잔다. 열차 안에서 그는 신문의 경마란을 본다. 아내 로즈가 물어보면 그는 경마 자체보다 머릿속에서 셈을 해보는 게 즐거워서라고 대답한다. 실제로 그는 계산하기를 좋아한다. 아내에게 말했듯이, 그것이 음악가로서 그가 하는 일이니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발레스트레로가 읽는 신문 하나도 의미 없이 들어간 게 없다는 것이다. 히치콕은 평생 불필요한 쇼트는 써본 적이 없는 감독이다. 가장 평범해 보이는 쇼트조차 어떤 식으로든 플롯에 기여하며 인상파 특유의 붓 터치가 인상파 회화를 풍성하게 한 것처럼 텍스트를 풍성하게 만든다. 히치콕 쇼트는 전체적인 맥락에서 바라볼 때만 의미를 획득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신문에 난 자동차 광고를 보게 된다. 그것은 젊은 여자가 두 명의 아이들과 차를 둘러싸고 있는 그림이다. 발레스트레로는 이를 보고 미소를 짓는데, 나중에 우리는 그에게 아내와 두 아이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또 다른 (그리고 더 훌륭한) 예는 신문에 나온 보험 회사 광고다. 이 쇼트는 사랑니 때문에 고생하는 로즈가 치과에 갈 돈 백 달러를 부탁하자 발레스트레로가 왜 갑자기 보험을 떠올리게 되는지 설명해준다. 칼 드레이어는 물론이고 무르나우에 필적하는, 대여섯 번 정도 되는 이 영화 최고의 클로즈업 중 첫번째는 그가 로즈와 얘기를 끝내고 로즈가 잠자리에 든 직후 나온다. 가볍고 사랑스럽게 사랑니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은 로즈는 곧 세상에 자기 같은 아내가 있느냐며 치료비를 부탁하고 인사를 한 뒤 잠자리에 든다. 생각에 빠진 헨리 폰다의 반응 쇼트가 긴 클로즈업으로 나온다. 이와 관련해서 비슷한 클로즈업이 끝에서 두 번째 릴에도 나오는데, 정신과 의사와 상담을 마친 발레스트레로가 미친 로즈를 제일 좋은 병원에 보내기로 결심하는 장면에서다. 시간의 경과를 적극적으로 포착한 이 두 클로즈업의 통렬한 아름다움은 삶의 본질인, 일상에 엄습하는 절박함에 대한 이해에서 나온다. 짧은 시간이지만 영원처럼 느껴지는 이 클로즈업에 잡힌 폰다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은 <향연>에서 플라톤이 묘사한 청년 알키비아데스의 아름다움에 비견된다. 그 기준은 오직 한점 꾸밈없는 사실성이다.

<누명 쓴 사나이>는 가장 놀라운 모험담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장 완벽하고 모범적인 다큐멘터리이기 때문이다. 위 두 클로즈업은 윤리적으로 모두 똑같이 끝난다. 후자의 경우는 발레스트레로가 의사에게 "제일 좋은 병원을 찾아주시오."라고 말하며 끝난다. 로즈를 미치게 만든 것이 두 사람의 행복에 대한 불안이었기 때문에 그는 더욱 아내를 사랑한다. 서로에 대한 애정의 다시 없는 증거인 것이다. 전자는 카메라가 베라 마일즈의 목덜미 깊숙이 키스를 하는 폰다를 팬하면서 끝이난다.

<누명 쓴 사나이>는 윤리적 일화인 동시에 미장센 강의다. 방금 든 예 외에도 히치콕이 몇개의 클로즈업에 해당하는 장면을 하나의 쇼트에 잡아 따로따로는 불가능했을 파워를 달성하는 것을 여러 번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를 그가 의도적으로, 꼭 필요한 순간에만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필요할 땐 그 반대도 시도한다. 한 쇼트에 해당하는 장면을 일련의 고속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는... 지문날인 장면이 바로 그렇다. 그는 이 수치의 상징과도 같은 장면을 오싹하리만큼 리얼하게 보여준다. 엄지손가락, 검지, 가운뎃손가락에 차례로 잉크를 바른다. 경찰의 얼굴, 폰다의 넋 나간 얼굴, 카드에 지문을 찍으면서 경찰이 폰다의 팔목을 비튼다. 이 모든 것이 빠르게 오버랩되는 쇼트들로 마치 <아카딘 씨> 같은 강박적 몽타주를 구성한다.

다음에 이어지는 완만한 전개(구치소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소지품을 비우는 등의)는 매니가 처한 육체적, 정신적 탈진 상태를 보여준다. 여기서부터 히치콕이, 특히 매니가 감방에 들어서는 장면에서, 철저히 단순한 기본 테크닉에 의존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히치콕 같은 카메라 비르투오소가 이렇게 과시 없는 스타일을 애용한다는 것은 그의 연출가적 재능에 대한 반증이다. 관객이 이미 매니의 악몽을 함께 했는데, 더 이상의 과장이나 미화는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는 브레송처럼 단지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다. 감방에 들어선 매니는 먼저 침대를 보고(침대의 리버스 앵글), 다음으로 세면대를(세면대의 리버스 앵글), 그리고 위를(천장과 벽의 리버스 앵글), 마지막으로 철창을 본다(철창의 리버스 앵글). 눈에는 들어오지만, 머리에는 들어오지 않는다.(형사 반장은 그 반대였다. 그는 눈으로 보지 않고 머리로 본다.) 듣기만 할 뿐 이해하지는 못하는 법정에서처럼. 알프레드 히치콕은 여기서, 의식이란 기본 데이터를 전달하는 데 영화가 철학이나 소설보다 얼마나 더 효과적인 수단인가를 여실히 증명한다. 매니는 지친 듯이 벽에 몸을 기댄다. 모멸에 취한 듯이. 그는 정신을 가다듬으려는 듯 두 눈을 꼭 감는다. 미디엄 쇼트로 그를 잡은 카메라는 다음 순간, 그를 끼고 그가 몸을 기댄 벽 쪽으로 급격한 수직 회전을 한다. 이 나선 움직임으로 화면은 다음날 아침 재판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법정에 안내되는 매니의 모습으로 전환된다. 히치콕은 흔히 이와 같은 전환으로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주관적 감정과 인상을 분석한다. 위에 말한 카메라 움직임으로 그는 순수하게 신체적 요소만 전달한다. 지친 매니가 두 눈을 꼭 감을 대의 눈꺼풀의 수축, 1초도 안되는 순간이지만 그것이 동공을 누르는 힘.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망막에도 무수한 형태들을 명멸하게 만든다. 이런 효과는 특별한 카메라 기술 없이는 연출하기 힘든 것이다. 기법만 있는 영화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여 우리의 감각기관에 침투, 의미를 형성하는 영화는 모든 것이다. 

<이창> 이후 히치콕은 이 같은 '표피' 효과를 진지하게 발전시켜 왔다. 그가 플롯 전개를 잠시 미루고 이런 효과를 삽입할 때 그는 작은 경련 하나까지도 잡힐 듯이 절묘하게 포착한다. 이런 네오리얼리즘적 기법은 그러나 결코 목적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과의 싸움에 직면했을 때 말보다 많은 것을 말해주는 육체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주위를 둘러 볼 수 있다는 것은 자유롭다는 뜻이다. 삶의 재현인 영화는 그래서 주변을 둘러보는 인물을 그린다. <누명 쓴 사나이>가 자신의 다른 작품들과 다르다는 히치콕의 선언은 옳았다. <누명 쓴 사나이>는 그의 이전 작품들과 정반대다. 서스펜스는 더 이상 '곧 일어날 것 같은 사건이 정말 발생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지 않고(<너무 많이 알고 있는 사나이>에서 그랬듯이), 반대로 일어날까봐 두려운 사건이 결국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누명 쓴 사나이>에서 공포는 서스펜스 자체가 환영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로버트 버크의 아름다운 촬영이 돋보이는, 매니를 법원으로 호송하는 경찰차가 현수교를 지나는 장면은 특히 주목을 받는다. 거대한 형교가 던지는 그림자 속에 덜컹거리며 지나가는 조그만 실루엣은 묘하게도 유령의 나라에 도착한 노스페라투의 마차를 연상시킨다. 아닌 게 아니라 매니는 지금 자기가 유령이 된 건지 다른 사람들이 모두 유령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있다. 그가 법정에서 다시 아내의 얼굴을 보게 되기까지 호송차 안에서 그의 눈을 스쳐간 거리들은 모두 신기루 같기만 하다. 아니, 아내마저도 어쩌면 신기루 같다. 매니가 7천5백 달러의 보석금을 낼 수 없어 보석을 기각 당하는 동안 로즈는 방청석 뒷자리에 조그맣게 보일 뿐이다. 
매니는 지방 검사를 만나기 위해 다른 죄수들과 같이 다시 롱아일랜드의 교도소로 보내진다. 모멸과 상처, 이것이 2장과 3장을 요약하는 도스토예프스키적 부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잡범들과 다시 감옥에 구치되며 이야기는 계속된다. 

악몽은 이제 현실이 되었다. <나는 고백한다>에서 로건 신부는 입을 열기를 거부했다. <누명 쓴 사나이>의 매니는 아예 말 자체를 불신하게 된다. 처음에는 수치심에서, 다음에는 소용 없음을 알기 때문에. 유치장에서 그는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 그는 오직 앞 사람의 발만 본다. 히치콕은 여기서 <나는 고백한다>에서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오토 E.하세에게 접근할 때 사용한, 후진 트랙킹에서 리버스 앵글 전진 트랙킹으로 연결되는 테크닉을 다시 한 번 사용한다. 보험회사 여직원이 타이피스트의 어깨 너머로 매니를 바라보는 장면도 같은 영화에서 칼 말덴이 부하의 어깨너머로 몽고메리 클리프트와 이야기를 나누는 앤 박스터를 지켜보던 것과 같은 이펙트다. 또 한 장면은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사나이>에서 반복한 것으로, 매니가 경찰이 불러준 메모를 다시 읽다 자신이 범인과 같은 오철을 범했음을 깨닫는 장면에 나온 횡적 클로즈업 트랙킹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세 테크닉이 앞의 영화에서들과 달리 비교적 덜 결정적인 순간에 쓰였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 효과는, 그 튀지 않는 위치 때문에, 오히려 더 강렬해졌다. 히치콕이 어떤 장치가 자아낼 효과를 사전에 완전히 파악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쓴 적이 없다는 증거로 이보다 나은 예는 없다. 그는 이제 자신이 발견한 테크닉들을 예술적 전제로서가 아니라 그 완결로 사용하고 있다. 

매니는 보석으로 출감한다. 보석금을 댄 것은 처남으로, 밖에서 로즈와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부터 로즈는 이야기의 중심 인물이 된다. 히치콕은 이를 역시 단일 쇼트로 보여준다. 매니가 헤어졌던 아이들과 만나 기뻐하는 동안 로즈는 변호사에게 전화를 건다. 그 동안 카메라는 그 위를 내내 머뭇거린다. 거의 망설이는 것처럼. 여기서 우리는 <의혹의 전망차>의 감독 알프레드 히치콕의 '죄악(guilt)'의 테마가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여기서 죄악의 문제는 무고한 사람이 남의 죄를 뒤집어 썼다는 사실이 아니라 매니의 자유와 로즈의 자유를 맞바꾼다는 사실에 존재한다. 매니에 대한 고소가 사실 무근이므로 <누명 쓴 사나이>에서는 사실 죄악의 문제가 제기될 여지가 없었다. 문제는 오히려 '결백함(innocence)'이었다. 

'The Wrong Man(애꿎은 남자)'이 'The Wrong Woman(애꿎은 여자)'이 된 것이다. 히치콕이 다른 무엇보다 '남녀'를 그리는 감독이란 점을 잊지 말자. 로즈의 순수함(innocence)은 전형적 형태의 순진함(naivety)이다. 그녀는 남편의 결백을 한 순간이라도 의심한 자신을 죄인으로 생각할만큼 순수했다. 그런 의심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일어나지 않을 일을 두려워한 데 대해 그녀는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순진함이란 때로 아주 모순된 행동을 불러일으킨다. 로즈의 순진성(아니, 차라리 어리석음)은 그녀를 정신 분열로 몰아가는 유일한 동기다. 남편이 돌아오지 않아 걱정하던 로즈가 경찰의 전화를 받는 장면을 생각해보자. 매니가 무장 강도 혐의로 체포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녀가 처음 보인 반응은 놀라운 것이다. "뭔가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어요." 그녀는 지금까지 생각도 못해본, 아니 앞으로도 그런 일을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입 밖에 낸 순간 의심은 이미 싹을 틔운다. 순진함은 때로 섣부른 잔인함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로즈는 이 섣부름의 대가를 광기로 치른다. 

일찍이 괴테와 발작이 격정에 눈이 가려 몰락에 이르는 이런 히로인을 묘사한 바 있다. 로즈는 변호사가 요구하는 알리바이를 찾기 위해 남편과 함께 최선을 다한다. 사건이 있던 날이 휴일이었으므로 부부는 함께 카드놀이를 한 사람을 미친듯이 찾아 다닌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로즈는 자신이 정말 남편을 믿어서라기보다는 의무감에서 돕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점점 확인하게 된다. 4장은 로즈를 속에서부터 갉아먹고 있던 이런 의혹의 충격적 확인으로 끝난다.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었던 목격자가 죽었음이 밝혀지자 로즈는 히스테릭한 웃음을 터뜨린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많은 일들이 개연성에 반해 발생하는 것이다. 로즈가 회한에서 미쳤다면, 그것은 광기가 논리에 반해 발생하기 때문이다. 

<누명 쓴 사나이>의 핵심적 장면들은 모두, 극적인 수준에서 그 정서적 강도를 배가시키고 내러티브 수준에서 그 의미를 정당화하는 '대응쌍'을 갖고 있다. 로즈의 히스테릭한 웃음은 사라진 목격자 소유의 아파트에 사는 여자 아이들의 웃음과 호응하고, 로즈가 매니를 때리는 장면은 그녀가 이 세상에서 행복이 얼마나 얻기 힘든 것인가를 농담처럼 말하던 도입부 장면과 호응한다. 상황의 자의성은 연출에 의해 강조된다. 폰다가 브러시로 맞는 장면은 사건의 시작과 끝만 보여주는 네 개의 고속 쇼트로 처리된다. 브러시를 든 로즈, 매니, 깨진 거울, 매니의 상처난 이마, 발레이 가까운 이 몽타주는 그러나 많은 것을 말해준다. 테크닉의 개발은 '스타일'로 승화될 수 있는 형식적 완성도가 따르지 않을 때 아무 의미가 없음을 히치콕은 보여준다.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말로는 이미 답을 내린바 있다. "형식이 스타일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변호사 오코너가 마치 페리 메이슨처럼 원고측 증인들을 심문하는 동안 매니가 테이블 밑으로 쥐고 있는 염주의 클로즈업. 끝까지 디테일을 물고 늘어진 끝에 오코너는 목적을 달성한다. 재판의 전개 양상에 질린 배심원단은 휴정을 요청하고, 오코너는 무효 심리를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인정된다. 두 번째 기적의 징조다. 

여전히 보석 상태인 매니는 집으로 돌아간다. 로즈가 없는 동안 그의 어머니가 살림을 보살피고 있다. 그는 재판이 중단되어 더욱 불안하다. 강도혐의는 차라리 자신이 범인인 것보다 더 그를 짓누르고 있다. 그러나 그는 신께 도움을 청하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어머니는, 도움을 청할 게 아니라 이겨낼 힘을 청하라고 말한다. 스토크 클럽에 나갈 준비를 하면서 그는 어머니의 말을 되새겨본다. 넥타이를 매는 매니의 클로즈업. 예수 그림의 클로즈업. 그림을 바라보는 매니의 클로즈업. 마지막 클로즈업은 다음 순간 이중 인화로 바뀐다. 매니의 얼굴 너머로 레인코트에 펠트 모자 차림의 남자 모습이 떠오른다. 남자는 얼굴이 매니의 클로즈업된 얼굴과 포개질때가지 쭉 걸어온다. 그의 모습은 매니와 거의 흡사하다. 그의 턱은 매니의 턱과 겹쳐지고, 그의 코는 매니의 코와 하나가 된다. 순간, 이중 인화는 사라진다. 화면에 남은 것은 진범의 얼굴로, 팬과 함께 카메라는 또 다시 무장강도를 벌이는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같은 장면 전환은 더 이상 줄거리를 연결하는 경첩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드라마 자체다. 이윽고 가게 안주인의 기지로 체포된 진범이 경찰서에 끌려온다. 매니를 심문한 형사는 복도를 지나 경철서를 나서다가 계단에서 멈춰선다. 매니의 결백을 깨달은 것이다. "어때, 매니?" 형사는 묻는다. "좋습니다."매니는 밝게 웃으며 대답한다. <누명 쓴 사나이>의 라스트 씬은 병원이다. 혐의가 풀렸다는 소식에도 불구하고 로즈의 상태는 호전될 기미가 없다. "기적을 기대했는데." 좌절한 매니가 중얼거린다. "기적은 일어나요." 간호사가 대꾸한다. "기다리는 법만 배우면 되요." 2년 후. 에필로그는 로즈가 완쾌되어 가족의 품에 돌아갔음을 알린다. 
해석은 각자의 몫이다. 

 

by 달의궁전 | 2008/03/28 17:21 | 영화자료 | 트랙백 | 덧글(0)

몽타주, 나의 아름다운 근심거리

※ 이 글은 고다르가 26살 때 집필한 것으로, 1956년 12월에 프랑스 영화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제65호)를 통해 발표되었다. 영화 감독이 되기 전 비평가 고다르가 발표한 글 가운데 「고전적 데쿠파주의 옹호와 예증」등과 더불어 중요하게 간주되는 것 가운데 하나로, 여기서 그는 몽타주에 대한 미장센의 우위라는 바쟁식의 사유를 재검토하며, 이 둘 간의 상호의존적인 특성을 강조한다. (괄호 안의 내용과 주는 역자가 덧붙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영화)을 편집실에서 구원할 것이다.” 제임스 크루즈, 그리피스, 스트로하임에게 잘 어울리던 이 금언(金言)은 무르나우나 채플린에게는 거의 적용되지 않는 것이었으며, 모든 유성영화들에 대해서는 돌이킬 수 없을만큼 그릇된 것이었다. 왜 그럴까? 왜냐하면 <10월 October> - 그리고 무엇보다 <멕시코 만세! Que Viva Mexico!>- 과 같은 영화에서, 몽타주는 무엇보다도 미장센의 필수불가결한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오직 위험을 감수할 때만이, 하나를 다른 하나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다. 이는 누군가가 리듬을 멜로디에서 분리하려 시도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다. <엘레나와 남자들 Elena et les hommes>과 <아카딘 씨 Mr. Arkadin>는 모두 몽타주의 모델들인데, 왜냐하면 각각의 영화가 미장센의 한 모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편집실에서 구원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는 전형적인 프로듀서들이 고수하는 원칙이다. 효과적인 편집이 없었더라면 흥미가 덜한 것이 되었을 영화에 편집이 줄 수 있는 최상의 것은, 정확히 말해 그 영화가 연출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최초의 인상이다. 편집은 속물들과 영화애호가들에 의해 무시되어왔던 바로 그 일시적인 우아함을 현실성(actuality)에 되돌려주는 것을 가능케 하고, 혹은 우연을 운명으로 전환시킬 수도 있다. 일반대중이 대본구성과 혼동하는 것(편집에 대한 이보다 더한 찬사가 가능할 것인가?

 

연출이 일종의 시선이라면 몽타주는 심장박동이다. 앞을 내다보는 것은 (연출과 몽타주) 양쪽 모두가 지닌 특성이다. 그러나 한쪽이 공간 속에서 앞을 내다보고자 한다면, 다른 하나는 시간 속에서 그렇게 한다. 당신이 거리에서 매력적인 한 소녀를 발견했다고 가정하자. 당신은 그녀를 쫓아가기를 주저한다. 4분의 1초. 이러한 주저함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미장센은 “어떻게 그녀에게 접근하지?”라는 물음에 답해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녀를 사랑하게 될까?”라는 또 다른 질문을 명백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당신은 4분의 1초, 두 개의 물음이 탄생한 그 시간에 중요성을 부과해야만 한다. 따라서, 한 관념(idea)의 삶을, 혹은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의 그것(관념)의 갑작스런 돌출을 정확하고 명백하게 표현하는 것은, 미장센보다는 몽타주에 의해서일 것이다. 언제? 말할 필요도 없이, 상황이 그것(몽타주)를 요구하는 매 순간, 한 쇼트 내에서 어떤 충격효과가 아라베스크를 대신하기를 요구하는 매 순간, 하나의 장면과 다른 장면 사이에서 영화의 내적 연속성이 쇼트의 변화와 함께 플롯의 변화에 캐릭터 묘사의 중첩(superimposition)을 요구하는 매 순간마다. 이러한 예는 미장센에 대한 언급이 자동적으로 몽타주에 대한 것을 함축하고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몽타주의 효과가 효과적으로 미장센의 효과를 능가할 때 후자의 아름다움은 배가되는데, 조작을 통한 그것(몽타주)의 마력에 의해 뜻하지 않게 비밀의 베일이 벗겨지는 것은 흡사 수학에서 미지수를 사용하는 것과도 유사하다.

 

몽타주의 유혹에 굴복하는 이라면 누구나 또한 간결한 쇼트의 유혹에 굴복하게 된다. 어떻게? 그의 게임에서 시선을 핵심적인 부분으로 만듦으로써. 시선에 의거해서 커팅하는 것이야말로 몽타주의 정의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 있는 것으로, 그것은 미장센에의 굴복일 뿐 아니라 편집이 지닌 최고의 야망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시선에 의거해서 커팅하는 것, 즉 진정한 의미에서의 몽타주)은 사실상 정신 밑에 숨은 영혼을 드러내고, 음모 뒤에 감추어진 열정을 드러내며, 시간개념에 힘입어 공간개념을 파괴함으로써 가슴이 지성을 능가하는 일이 가능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너무 많이 알았던 남자 The Man Who Knew Too Much> 리메이크판에 나오는 유명한 심벌즈 시퀀스는 이에 대한 최고의 예이다. 이행(transition)에 대해 사고하는 것이 촬영에 관한 문제의 일부분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하나의 장면을 얼마나 오래 지속시킬 것인지를 안다는 것은 이미 몽타주인 것이다. 확실히, 멋지게 연출된 영화는 쇼트와 쇼트가 단순히 배치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주지만, 멋지게 편집된 영화는 모든 연출된 부분을 감추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이다. 영화적으로 말하자면, 서로 다른 주제를 다루고 있음을 인정한다면, <알렉산더 네프스키 Alexander Nevsky>의 전투장면이 <내비게이터 The navigator>에 비해 결코 열등하다고 할 수 없다. 달리 말해서 운동을 통해 지속(duration)의 인상을 주는 것, 롱 쇼트를 통해 클로즈업 쇼트의 인상을 주는 것은 미장센의 목적들 가운데 하나이며 몽타주의 목적들 가운데 하나와는 반대되는 것이다. 창안과 즉흥성(improvisation)은 세트 위에서 뿐 아니라 무비올라 편집기 앞에서도 일어나는 것이다. 카메라 무브먼트를 넷으로 쪼개어 편집하는 것이 그것을 (하나의) 쇼트로 유지시키는 것보다 효과적임이 입증될 수도 있으리라. 우리가 앞서 언급한 예로 되돌아가 보면, 눈짓(glance)의 교환은 오직 - 필요한 경우에 행해지는 - 편집에 의해서만 충분한 힘을 지니고 표현될 수 있다. 발자크의 소설 <불가해한 사건 Une Tenebreuse Affaire>에서, 페이라드와 코랑탱이 생 시뉴 살롱의 문을 밀칠 때, 그들의 첫 번째 눈짓은 로랑스를 향하고 있다. ‘우린 나의 연인, 당신을 얻을 거야’ - ‘난 당신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겠어’. 자신만만한 젊은 여성과 푸쉐의 스파이는 단 한 번의 시선을 통해 그들의 가장 치명적인 적을 발견한다. 매우 절제된 방식으로, 하나의 단순한 역 쇼트가 어떠한 팬 혹은 트래킹 쇼트의 주의 깊은 사용보다도 훨씬 강력하게 이와 같은 놀랄만한 눈짓의 교환을 잘 묘사할 수 있다. 전달되어져야 하는 것은 그 투쟁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것인가 하는 점과 어떤 지평 위에서 그 싸움이 벌어지는가 하는 점이다. 따라서, 몽타주는 미장센을 위한 길을 부정함과 동시에 예비한다. 그 둘은 상호의존적이다. 수단을 도식(scheme)으로 향하게끔 연출하는 것, 그리고 우리는 하나의 도식에 대해 그것이 적절히 혹은 잘못 안착되어있다고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감독은 자신의 필름이 편집되는 것을 관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편집자 또한 아크 등의 열기를 위해 접착제와 셀룰로이드의 냄새를 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되는 이유이다. 세트 위를 배회하면서, 감독은 한 장면의 흥미가 어디에 놓여 있는가를, 그 장면의 강약의 순간들은 어느 때인가를, 쇼트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럼으로써 단순히 운동에 의거해서 커팅하는 것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게 될 것이다. - 몽타주의 ABC를, 나는 인정한다. 단 그것이 이를테면 종종 하나의 장면이 흥미로워지기 시작하는 순간에 커팅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마르그리트 르느와르의 방식으로 지나치게 기계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서. 그렇게 함으로써, 편집자는 연출로 나아가는 최초의 발걸음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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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나와 남자들>(1956)은 프랑스의 영화감독 장 르느와르 작품이며 <아카딘 씨>(1948)는 오손 웰즈의 작품이다. 이 두 영화는 모두 이 글이 발표된 해인 1956년에 프랑스에서 개봉되었다. 또 고다르가 뽑은 그 해의 베스트 필름 리스트 1,2위에 올라있기도 한데 1위가 <아카딘 씨>, 그리고 2위가 <엘레나와 남자들>이었다. 그리고 3위에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너무 많이 알았던 남자>(1955)가 올라 있다.

 

여기서 말하는 <너무 많이 알았던 남자>는 히치콕이 미국시절에 만든 1955년 판 컬러영화이다. 그는 영국에서 활동하던 당시에 이미 동명의 흑백영화를 제작한 바 있다. 영국시절의 <너무 많이 알았던 남자>는 1934년에 발표된 것으로 따라서 두 영화 사이에는 22년의 시간적 격차가 있다.

 

장 르느와르의 2.30년대 영화에서 편집을 담당했다. 참여한 작품으로는 <익사에서 구조된 부두 씨>(1932), <랑주 씨의 범죄>(1935), <시골에서의 하루>(1936), <게임의 규칙>(1939) 등 다수.

by 달의궁전 | 2008/03/20 19:02 | 영화자료 | 트랙백 | 덧글(0)

빌리 와일더와 할리우드 (7) [아반티!]

빌리 와일더와 할리우드 시리즈를 6회까지 써놓고 멈춘 이유는, 제2회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 ‘빌리 와일더 특별전’이 들어있어 이왕이면 때를 맞추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번 특별전 목록에는 그의 초기걸작이 아닌 후기 작품들이 대거 편성되었는데, 아마도 대중에게 낯선 영화를 통해 그의 영화세계를 폭넓게 조명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빌리 와일더의 후기 걸작으로 평가받는 1972년작 <아반티! (Avanti!)>는 이태리의 휴양지 이스키아 섬에서 발생한 노년 커플의 죽음을 두고 벌이는 자식들의 이야기와, 이탈리아와 미국의 문화적 차이에 대한 거침없는 조롱과 깔끔한 유머의 퍼레이드가 뒤섞인 작품이다. 또한 부모세대의 로맨스의 족적을 확인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합리적 이성이 빚은 오만과 편견에 대한 속 깊은 성찰을 담아내고 있기도 하다.

유치찬란한 골프복장을 한 사내가 막 헬기에서 내려 출발 직전의 로마행 비행기로 옮겨 타려하는데, 골프장에서 부친의 사망소식을 듣고 시신운구를 위해 막 떠나려는 이 남자의 이름은 윈델 암브루스터 주니어(잭 레먼 분)다. 로마에서 이스키아까지 가는 동안 기차와 페리에서 번번이 마주치는 파멜라 피고트(줄리엣 밀즈 분)가 거슬리지만, 이틀 안에 모든 절차를 마치고 볼티모어로 돌아가기만 하면 그만이다. 이쯤 되어 눈 밝은 관객이라면 두 사람이 무언가 동일한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을 짐작하고도 남을 터이다. 과연 모든 일이 암브루스터의 뜻대로 순조롭게 진행될까? 그러나 한시가 급한 그의 뜻대로 움직여주기는커녕, 섬광처럼 찾아온 뜻밖의 로맨스가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기》에서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까 죽기 전에 여행을 하는 사람이면 꼭 이태리 나폴리를 구경하고 죽으라’는 기행문의 일절을 남겼다. 괴테에게 속과 초속(超俗)의 경계선은 나폴리였다. 즉 나폴리는 세속에서 천상으로 입문하는 홀리 시티(holy city)였던 셈이다. 나폴리 근처에는 로마제국의 흥망을 겪은 수많은 유적과, 푸른 하늘과 아름다운 명승지가 있으며, 남쪽으로는 노래로 널리 알려진 소렌토 거리와 카프리 섬, 그리고 나폴리 만의 서쪽에 위치한 또 하나의 자랑거리, 이스키아 섬이 있다. 이스키아 섬이라고 하면 나이 든 영화 팬들에게 떠오르는 것이, 깜찍한 아역 마리아 레티치아 가조니가 홀아비인 아버지 도미니코 모듀뇨와 약혼자가 있는 젊은 여성 안토네라 루알디를 결합시켜 주는 조숙한 소녀 역을 연기한 추억의 이태리 영화 <푸른 파도여 언제까지나>일 것이다. 영화의 원 제목은 <이스키아에서의 약속 (Appuntamento a lschia, 1960)>인데,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통해서 이스키아 섬을 알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남국의 눈부신 태양에 빛나는 이스키아 섬의 아름다운 풍광과 밝고 경쾌한 칸초네의 선율은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싱그러움과 즐거움을 안겨준 휴양지영화였다. 게다가, 영화에 흘러나오는 미나 마치니의 칸초네 ‘행복은 가득히 ll cielo in una stanza’를 잊지 못하는 올드팬도 많을 것이리라.



매년 8월 15일부터 9월 15일까지 10년 동안 부부처럼 지내오다 급커브 길에서 추락사로 끝맺은 암브루스터의 아버지와 피고트의 어머니 사이에서 피어난 로맨스는 호텔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그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직원들이 암브루스터에게 보여주는 후의는 불륜이라는 단어가 무색하리만치 진심으로 차있다. 그러니 8월의 태양아래 휴양지에서 만난 노인들이 은밀한 로맨스를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하고 지원하기에 이태리인만한 사람들이 또 있을까. (호텔 바에서 춤을 추는 노년 커플들을 보라.) 와일더가 이태리인들과 문화에 대하여 정확히 포착하였다는 것은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설정들, 즉 암브루스터와 카를루치와의 대화, 부르노와 암브루스터 사이에 오가는 대화만 보더라도 쉽게 증명 된다. 때문에 와일더가 이태리의 휴양지를 보여주며 관객에게 전하고자 한 것은 간도 빼줄 것 같은 종업원들의 몸에 밴 친절이 아니라, 그들의 친절이 관광객들에게 긍정적 효과를 미치고 나아가 그곳 사람들의 생업과 연동되는 방식을 살펴보라는 것일 수 도 있다.

덧붙이자면, 노년의 커플이 벌이는 로맨스가 이태리인들에게 아름답게 보이기도 했겠지만, 엄격히 말해서 엑셀시오 호텔 관계자들에게는 돈 많은 단골고객을 위한 당연한 배려였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들이 사라지고 남은 자리에 등장한 2세들을 위한 지배인과 종업원의 친절과 후의는 이태리인들의 삶의 방식이자 철저히 계산된 상술에 근거했다고 봐도 무방하지만, 그것이 만들어내는  화학작용마저도 와일더답지 않던가.


예의 빌리 와일더의 영화가 그러하듯 <아반티!> 역시 부모의 불륜과 동반사망이라는 부정적이며 불편한 상황 속에 두 남녀를 몰아넣지만, 나폴리 일대의 풍광은 그들에게 심각한 애도의 시간마저 허락하지 않는 대신, 그들마저 부모의 흔적을 찾아 나서게 만들고 있다. 이것은 당연히 시종 즐겁게 이야기하며 사랑의 찬가를 불러대는 호텔직원들의 수다스런 모습으로 상징화된 이태리인의 감수성에 기인한다.

한 가지, 주요인물의 국적이 미국, 이태리, 영국이라는 것은 눈여겨 볼만 한데, 즉 2차 대전을 기점으로 세계의 패권을 차지한 미국인의 오만과 우월감에 대하여 와일더식 냉소주의가 어김없이 흐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윈델 암브루스터는 미국 볼티모어의 재벌이고 피고트는 런던의 가게에서 일하는 점원이며, 카를루치는 이스키아 엑셀시오 호텔의 지배인이다. 여기서 와일더는 각자의 문화적 배경을 근거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인물들을 통해 국민성과 개별적 문화의 차이와 소통가능성을 모색하게 된다.

기업가의 운영방식으로 손상된 포도밭 보상금을 종결지으려던 암브루스터가 트로타 일가에게 완패당하는 장면이나, 관을 주문하는 것에서부터 검역증명서를 비롯한 제반 행정절차를 오로지 일가친척의 힘으로 해결해나가는 대단한 지배인 카를루치의 일처리 솜씨는 기실 이태리인들의 삶의 방식과 관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또한 출국허가서 발급과 관련하여 “이것이 당신들이 말하는 이태리의 정의인가?”라는 암브루스터의 말을 한 템포 죽이고는 “그럼 사코-반젠티 사건(필자 註)은 어떻게 된 거죠?”라며 반격할 때의 득의양양한 표정은 이태리 특유의 결속력을 엿보게 할 정도다. 더욱이 1시에서 4시까지의 점심을 방해받지 않으려는 이태리의 관습 때문에 헬기장관리인의 트럭 짐칸에 실려 특급호텔에 도착하는 미 국무성 관료 블로젯의 모습은 웃음을 넘어 묘한 쾌감마저 불러일으키며, 미국인의 우월감에 찬물을 끼얹는 인물로 설정되어 결정적 장면마다 빛을 발하던 (미국에서 강제추방당한)브루노가 마지막 스스로 그 찬란한 천 조각을 뒤집어쓰면서 꿈에 그리던 목적지로 향하는 모습이라니.  


피고트는 여행안내책자에 적힌 문구를 사실로 체험하고는 “이태리는 국가가 아니고 감성”이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사회적 지위에 걸맞게 거창한 장례식을 준비하던 암브루스터가 장례식 이후 벌어질 주주들의 반응과 파업타결, 리콜해결 등 산적한 업무에 회의를 느끼는 것도 이태리인의 감성과 여유로운 풍광에 매료되었다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결국 결정적 순간에 등장한 국무성 관료 조조 블로젯의 무례와 사무적인 언동에(마치 <7년만의 외출>에서 셔먼의 집으로 쳐들어온 톰 매킨지의 모습과 중첩될 정도다) 질린 암브루스터가 결단을 내리는 것도 모두 이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인류는 이성과 합리주의라는 모더니즘 세계에 빠져 살았다. 이런 가운데 욕망을 절제하고 이성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대신 감성의 목마름을 애써 외면해 오지 않았던가. 때문에 영화는, 도시 산업화로 대변되는 기계문명의 숨 막히는 공간에 찌든 현대인들에게 넉넉하고 햇빛 찬란한 지중해 풍광 앞에서 이성의 시대와 결별하고 감성의 시간으로 들어가 보기를 권하고 있는 것이다.



<아반티!>를 시종 이끌며 웃음을 만들어내는 기제는 ‘역할의 뒤바뀜’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공간은 그대로 놔둔 채 인물들의 상황과 모습이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영화의 첫 장면에서 주인공은 헬기에서 내려 비행기로 바꿔 타더니, 옷을 바꿔 입고, 그로인해 여권도 바뀐다. 결국은 호텔에서 만난 피고트와 함께 자신들의 부모가 했던 행위마저 대치하기에 이르는데, 그토록 미국에 가고 싶어 했던 브루노가 미국에 어떻게 가게 되는 지를 놓치지 말 일이다. 이렇듯 영화는 시작부터 바뀌고 또 바뀌는 과정의 연속을 드러내더니 마지막까지도 뒤바뀜을 통해 시원스런 웃음을 전달한다. 그러므로 영화 내내 수 없이 들리던, 이태리인(호텔종업원)의 “페르메소(실례합니다)”와 미국인(암브루스터)의 신경질적인 대답 “아반티!(들어오세요)”는 미국과 이태리, 두 문화 사이의 상호소통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할 수 있다. 영화는 이러한 가능성에서 한 발 더 나가더니, 오로지 “아반티”만 외치던 암브루스터가 욕실의 체중계에 올라선 피고트에게 “페르메소”라며 묻는 장면을 통해 뒤바뀜이 빚어낸 아름다운 프로포즈를 연출해냄으로써 와일더의 영화가 아니면 쉽게 맛볼 수 없는 빛나는 순간을 일궈낸다.


그동안 와일더가 보여준 캐릭터의 흥미로움이나 이야기를 따르면서 즐거움을 찾아온 이들에게 <아반티!>는 더 없는 즐거움을 제공할 것인데, 그것은 그림엽서처럼 아름다운 이탈리아의 풍경에 더해진 주인공과 그 주변인들이 알려주는 다른 삶의 모습을 디자인하는 방법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부모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한 자리에 모인 인물들과 그들을 둘러싼 평화롭고 한적한 나폴리의 휴양지를 배경으로 펼쳐내는 이 사려 깊고 유쾌한 드라마는, 단언컨대 와일더 영화의 특질을 더할 나위 없이 맛볼 수 있는 수작이다. 지중해의 풍광 위에 이태리인들의 감성과 빌리 와일더가 만났으니, 그 특유의 유머가 어찌 달콤쌉사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註 : 사코-반젠티 사건 Sacco-Vanzetti case은 1920년에 매사추세츠 주의 공장에서 발생한 살인강도사건의 범인으로 이탈리아계 이민자인 사코와 반젠티를 검거하여 사형집행까지 마쳤지만, 1959년에 진범이 잡힘으로써, 이민자에 대한 미국의 배타적 성향이 드러난 미국사법사상 최악의 오심으로 기록된 사건 중 하나이다)  
2007.02.02
백건영(영화평론가)
편집장

by 달의궁전 | 2007/10/09 10:30 | 네오이마주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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