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3월 20일
몽타주, 나의 아름다운 근심거리
※ 이 글은 고다르가 26살 때 집필한 것으로, 1956년 12월에 프랑스 영화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제65호)를 통해 발표되었다. 영화 감독이 되기 전 비평가 고다르가 발표한 글 가운데 「고전적 데쿠파주의 옹호와 예증」등과 더불어 중요하게 간주되는 것 가운데 하나로, 여기서 그는 몽타주에 대한 미장센의 우위라는 바쟁식의 사유를 재검토하며, 이 둘 간의 상호의존적인 특성을 강조한다. (괄호 안의 내용과 주는 역자가 덧붙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영화)을 편집실에서 구원할 것이다.” 제임스 크루즈, 그리피스, 스트로하임에게 잘 어울리던 이 금언(金言)은 무르나우나 채플린에게는 거의 적용되지 않는 것이었으며, 모든 유성영화들에 대해서는 돌이킬 수 없을만큼 그릇된 것이었다. 왜 그럴까? 왜냐하면 <10월 October> - 그리고 무엇보다 <멕시코 만세! Que Viva Mexico!>- 과 같은 영화에서, 몽타주는 무엇보다도 미장센의 필수불가결한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오직 위험을 감수할 때만이, 하나를 다른 하나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다. 이는 누군가가 리듬을 멜로디에서 분리하려 시도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다. <엘레나와 남자들 Elena et les hommes>과 <아카딘 씨 Mr. Arkadin>는 모두 몽타주의 모델들인데, 왜냐하면 각각의 영화가 미장센의 한 모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편집실에서 구원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는 전형적인 프로듀서들이 고수하는 원칙이다. 효과적인 편집이 없었더라면 흥미가 덜한 것이 되었을 영화에 편집이 줄 수 있는 최상의 것은, 정확히 말해 그 영화가 연출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최초의 인상이다. 편집은 속물들과 영화애호가들에 의해 무시되어왔던 바로 그 일시적인 우아함을 현실성(actuality)에 되돌려주는 것을 가능케 하고, 혹은 우연을 운명으로 전환시킬 수도 있다. 일반대중이 대본구성과 혼동하는 것(편집에 대한 이보다 더한 찬사가 가능할 것인가?
연출이 일종의 시선이라면 몽타주는 심장박동이다. 앞을 내다보는 것은 (연출과 몽타주) 양쪽 모두가 지닌 특성이다. 그러나 한쪽이 공간 속에서 앞을 내다보고자 한다면, 다른 하나는 시간 속에서 그렇게 한다. 당신이 거리에서 매력적인 한 소녀를 발견했다고 가정하자. 당신은 그녀를 쫓아가기를 주저한다. 4분의 1초. 이러한 주저함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미장센은 “어떻게 그녀에게 접근하지?”라는 물음에 답해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녀를 사랑하게 될까?”라는 또 다른 질문을 명백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당신은 4분의 1초, 두 개의 물음이 탄생한 그 시간에 중요성을 부과해야만 한다. 따라서, 한 관념(idea)의 삶을, 혹은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의 그것(관념)의 갑작스런 돌출을 정확하고 명백하게 표현하는 것은, 미장센보다는 몽타주에 의해서일 것이다. 언제? 말할 필요도 없이, 상황이 그것(몽타주)를 요구하는 매 순간, 한 쇼트 내에서 어떤 충격효과가 아라베스크를 대신하기를 요구하는 매 순간, 하나의 장면과 다른 장면 사이에서 영화의 내적 연속성이 쇼트의 변화와 함께 플롯의 변화에 캐릭터 묘사의 중첩(superimposition)을 요구하는 매 순간마다. 이러한 예는 미장센에 대한 언급이 자동적으로 몽타주에 대한 것을 함축하고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몽타주의 효과가 효과적으로 미장센의 효과를 능가할 때 후자의 아름다움은 배가되는데, 조작을 통한 그것(몽타주)의 마력에 의해 뜻하지 않게 비밀의 베일이 벗겨지는 것은 흡사 수학에서 미지수를 사용하는 것과도 유사하다.
몽타주의 유혹에 굴복하는 이라면 누구나 또한 간결한 쇼트의 유혹에 굴복하게 된다. 어떻게? 그의 게임에서 시선을 핵심적인 부분으로 만듦으로써. 시선에 의거해서 커팅하는 것이야말로 몽타주의 정의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 있는 것으로, 그것은 미장센에의 굴복일 뿐 아니라 편집이 지닌 최고의 야망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시선에 의거해서 커팅하는 것, 즉 진정한 의미에서의 몽타주)은 사실상 정신 밑에 숨은 영혼을 드러내고, 음모 뒤에 감추어진 열정을 드러내며, 시간개념에 힘입어 공간개념을 파괴함으로써 가슴이 지성을 능가하는 일이 가능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너무 많이 알았던 남자 The Man Who Knew Too Much> 리메이크판에 나오는 유명한 심벌즈 시퀀스는 이에 대한 최고의 예이다. 이행(transition)에 대해 사고하는 것이 촬영에 관한 문제의 일부분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하나의 장면을 얼마나 오래 지속시킬 것인지를 안다는 것은 이미 몽타주인 것이다. 확실히, 멋지게 연출된 영화는 쇼트와 쇼트가 단순히 배치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주지만, 멋지게 편집된 영화는 모든 연출된 부분을 감추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이다. 영화적으로 말하자면, 서로 다른 주제를 다루고 있음을 인정한다면, <알렉산더 네프스키 Alexander Nevsky>의 전투장면이 <내비게이터 The navigator>에 비해 결코 열등하다고 할 수 없다. 달리 말해서 운동을 통해 지속(duration)의 인상을 주는 것, 롱 쇼트를 통해 클로즈업 쇼트의 인상을 주는 것은 미장센의 목적들 가운데 하나이며 몽타주의 목적들 가운데 하나와는 반대되는 것이다. 창안과 즉흥성(improvisation)은 세트 위에서 뿐 아니라 무비올라 편집기 앞에서도 일어나는 것이다. 카메라 무브먼트를 넷으로 쪼개어 편집하는 것이 그것을 (하나의) 쇼트로 유지시키는 것보다 효과적임이 입증될 수도 있으리라. 우리가 앞서 언급한 예로 되돌아가 보면, 눈짓(glance)의 교환은 오직 - 필요한 경우에 행해지는 - 편집에 의해서만 충분한 힘을 지니고 표현될 수 있다. 발자크의 소설 <불가해한 사건 Une Tenebreuse Affaire>에서, 페이라드와 코랑탱이 생 시뉴 살롱의 문을 밀칠 때, 그들의 첫 번째 눈짓은 로랑스를 향하고 있다. ‘우린 나의 연인, 당신을 얻을 거야’ - ‘난 당신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겠어’. 자신만만한 젊은 여성과 푸쉐의 스파이는 단 한 번의 시선을 통해 그들의 가장 치명적인 적을 발견한다. 매우 절제된 방식으로, 하나의 단순한 역 쇼트가 어떠한 팬 혹은 트래킹 쇼트의 주의 깊은 사용보다도 훨씬 강력하게 이와 같은 놀랄만한 눈짓의 교환을 잘 묘사할 수 있다. 전달되어져야 하는 것은 그 투쟁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것인가 하는 점과 어떤 지평 위에서 그 싸움이 벌어지는가 하는 점이다. 따라서, 몽타주는 미장센을 위한 길을 부정함과 동시에 예비한다. 그 둘은 상호의존적이다. 수단을 도식(scheme)으로 향하게끔 연출하는 것, 그리고 우리는 하나의 도식에 대해 그것이 적절히 혹은 잘못 안착되어있다고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감독은 자신의 필름이 편집되는 것을 관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편집자 또한 아크 등의 열기를 위해 접착제와 셀룰로이드의 냄새를 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되는 이유이다. 세트 위를 배회하면서, 감독은 한 장면의 흥미가 어디에 놓여 있는가를, 그 장면의 강약의 순간들은 어느 때인가를, 쇼트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럼으로써 단순히 운동에 의거해서 커팅하는 것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게 될 것이다. - 몽타주의 ABC를, 나는 인정한다. 단 그것이 이를테면 종종 하나의 장면이 흥미로워지기 시작하는 순간에 커팅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마르그리트 르느와르의 방식으로 지나치게 기계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서. 그렇게 함으로써, 편집자는 연출로 나아가는 최초의 발걸음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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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나와 남자들>(1956)은 프랑스의 영화감독 장 르느와르 작품이며 <아카딘 씨>(1948)는 오손 웰즈의 작품이다. 이 두 영화는 모두 이 글이 발표된 해인 1956년에 프랑스에서 개봉되었다. 또 고다르가 뽑은 그 해의 베스트 필름 리스트 1,2위에 올라있기도 한데 1위가 <아카딘 씨>, 그리고 2위가 <엘레나와 남자들>이었다. 그리고 3위에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너무 많이 알았던 남자>(1955)가 올라 있다.
여기서 말하는 <너무 많이 알았던 남자>는 히치콕이 미국시절에 만든 1955년 판 컬러영화이다. 그는 영국에서 활동하던 당시에 이미 동명의 흑백영화를 제작한 바 있다. 영국시절의 <너무 많이 알았던 남자>는 1934년에 발표된 것으로 따라서 두 영화 사이에는 22년의 시간적 격차가 있다.
장 르느와르의 2.30년대 영화에서 편집을 담당했다. 참여한 작품으로는 <익사에서 구조된 부두 씨>(1932), <랑주 씨의 범죄>(1935), <시골에서의 하루>(1936), <게임의 규칙>(1939) 등 다수.
# by | 2008/03/20 19:02 | 영화자료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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