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3월 28일
<누명 쓴 사나이> 공포의 작동 기제; 환영으로서의 서스펜스
고다르가 <<카이에 뒤 시네마>>에 쓴 글
스토크 클럽은 널리 알려진 것처럼 뉴욕에서 가장 세련된 만남의 장소이다. 에어컨, 자욱한 시가 연기, 선명한 립스틱... 그러나 크레딧 너머로 차츰 비어가는 실내에 자리한 카메라는 그곳의 스타나 백만장자를 보고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노곤한 블루스를 연주하는 평범한 작은 악단 쪽으로 다가간다. 스토크 클럽은 문을 닫고, 크리스토퍼 발레스테로(헨리 폰다)는 연주를 마치고 더블 베이스를 챙겨 도어맨에게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선다. 이 때 화면의 앵글 때문에, 잠시 두 형사가 그를 따라오는 것처럼 보인다. 잠시. 그러나 다음 순간 형사들은 그의 옆을 지나쳐 앞서 가기 시작한다. 이 쇼트로 히치콕은 발레스트레로를 기다리고 있는 구속과 더불어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게 될 '운명'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각인시킨다.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사나이>의 히치콕에게 심리학은 전혀 관심 밖이다. 중요한 것은 운명의 반전이다. 게임을 즐기고, 언제나 공정하게 게임하는 히치콕은 사실 크레딧이 나오기 전부터 관객에게 경고를 했다. 강렬한 콘트라스트의 조명 속에 그의 땅딸한 실루엣이 나타나 몇 걸음 떼다 멈춘다. 낮고 온건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이 영화는 내 다른 작품과 다릅니다. 서스펜스 같은 건 없습니다. 오직 사실뿐입니다." 그러나 이 말 속엔 또 다른 뜻이 담겨 있다. <누명 쓴 사나이>의 서스펜스는 운명 자체다. 이 영화의 주제는 사건의 예측 불가능함이 아니라 그 가능함, '그럴 수 있음'이다. <누명 쓴 사나이>에서 히치콕은 모든 쇼트, 모든 전환, 모든 화면 구성을 아무런 꾸밈 없이, 철저히 논리적으로 관리한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원하는 것은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다.
발레스트레로(친구들에겐 '매니'로 불리는)는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 잠을 잔다. 열차 안에서 그는 신문의 경마란을 본다. 아내 로즈가 물어보면 그는 경마 자체보다 머릿속에서 셈을 해보는 게 즐거워서라고 대답한다. 실제로 그는 계산하기를 좋아한다. 아내에게 말했듯이, 그것이 음악가로서 그가 하는 일이니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발레스트레로가 읽는 신문 하나도 의미 없이 들어간 게 없다는 것이다. 히치콕은 평생 불필요한 쇼트는 써본 적이 없는 감독이다. 가장 평범해 보이는 쇼트조차 어떤 식으로든 플롯에 기여하며 인상파 특유의 붓 터치가 인상파 회화를 풍성하게 한 것처럼 텍스트를 풍성하게 만든다. 히치콕 쇼트는 전체적인 맥락에서 바라볼 때만 의미를 획득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신문에 난 자동차 광고를 보게 된다. 그것은 젊은 여자가 두 명의 아이들과 차를 둘러싸고 있는 그림이다. 발레스트레로는 이를 보고 미소를 짓는데, 나중에 우리는 그에게 아내와 두 아이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또 다른 (그리고 더 훌륭한) 예는 신문에 나온 보험 회사 광고다. 이 쇼트는 사랑니 때문에 고생하는 로즈가 치과에 갈 돈 백 달러를 부탁하자 발레스트레로가 왜 갑자기 보험을 떠올리게 되는지 설명해준다. 칼 드레이어는 물론이고 무르나우에 필적하는, 대여섯 번 정도 되는 이 영화 최고의 클로즈업 중 첫번째는 그가 로즈와 얘기를 끝내고 로즈가 잠자리에 든 직후 나온다. 가볍고 사랑스럽게 사랑니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은 로즈는 곧 세상에 자기 같은 아내가 있느냐며 치료비를 부탁하고 인사를 한 뒤 잠자리에 든다. 생각에 빠진 헨리 폰다의 반응 쇼트가 긴 클로즈업으로 나온다. 이와 관련해서 비슷한 클로즈업이 끝에서 두 번째 릴에도 나오는데, 정신과 의사와 상담을 마친 발레스트레로가 미친 로즈를 제일 좋은 병원에 보내기로 결심하는 장면에서다. 시간의 경과를 적극적으로 포착한 이 두 클로즈업의 통렬한 아름다움은 삶의 본질인, 일상에 엄습하는 절박함에 대한 이해에서 나온다. 짧은 시간이지만 영원처럼 느껴지는 이 클로즈업에 잡힌 폰다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은 <향연>에서 플라톤이 묘사한 청년 알키비아데스의 아름다움에 비견된다. 그 기준은 오직 한점 꾸밈없는 사실성이다.
<누명 쓴 사나이>는 가장 놀라운 모험담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장 완벽하고 모범적인 다큐멘터리이기 때문이다. 위 두 클로즈업은 윤리적으로 모두 똑같이 끝난다. 후자의 경우는 발레스트레로가 의사에게 "제일 좋은 병원을 찾아주시오."라고 말하며 끝난다. 로즈를 미치게 만든 것이 두 사람의 행복에 대한 불안이었기 때문에 그는 더욱 아내를 사랑한다. 서로에 대한 애정의 다시 없는 증거인 것이다. 전자는 카메라가 베라 마일즈의 목덜미 깊숙이 키스를 하는 폰다를 팬하면서 끝이난다.
<누명 쓴 사나이>는 윤리적 일화인 동시에 미장센 강의다. 방금 든 예 외에도 히치콕이 몇개의 클로즈업에 해당하는 장면을 하나의 쇼트에 잡아 따로따로는 불가능했을 파워를 달성하는 것을 여러 번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를 그가 의도적으로, 꼭 필요한 순간에만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필요할 땐 그 반대도 시도한다. 한 쇼트에 해당하는 장면을 일련의 고속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는... 지문날인 장면이 바로 그렇다. 그는 이 수치의 상징과도 같은 장면을 오싹하리만큼 리얼하게 보여준다. 엄지손가락, 검지, 가운뎃손가락에 차례로 잉크를 바른다. 경찰의 얼굴, 폰다의 넋 나간 얼굴, 카드에 지문을 찍으면서 경찰이 폰다의 팔목을 비튼다. 이 모든 것이 빠르게 오버랩되는 쇼트들로 마치 <아카딘 씨> 같은 강박적 몽타주를 구성한다.
다음에 이어지는 완만한 전개(구치소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소지품을 비우는 등의)는 매니가 처한 육체적, 정신적 탈진 상태를 보여준다. 여기서부터 히치콕이, 특히 매니가 감방에 들어서는 장면에서, 철저히 단순한 기본 테크닉에 의존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히치콕 같은 카메라 비르투오소가 이렇게 과시 없는 스타일을 애용한다는 것은 그의 연출가적 재능에 대한 반증이다. 관객이 이미 매니의 악몽을 함께 했는데, 더 이상의 과장이나 미화는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는 브레송처럼 단지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다. 감방에 들어선 매니는 먼저 침대를 보고(침대의 리버스 앵글), 다음으로 세면대를(세면대의 리버스 앵글), 그리고 위를(천장과 벽의 리버스 앵글), 마지막으로 철창을 본다(철창의 리버스 앵글). 눈에는 들어오지만, 머리에는 들어오지 않는다.(형사 반장은 그 반대였다. 그는 눈으로 보지 않고 머리로 본다.) 듣기만 할 뿐 이해하지는 못하는 법정에서처럼. 알프레드 히치콕은 여기서, 의식이란 기본 데이터를 전달하는 데 영화가 철학이나 소설보다 얼마나 더 효과적인 수단인가를 여실히 증명한다. 매니는 지친 듯이 벽에 몸을 기댄다. 모멸에 취한 듯이. 그는 정신을 가다듬으려는 듯 두 눈을 꼭 감는다. 미디엄 쇼트로 그를 잡은 카메라는 다음 순간, 그를 끼고 그가 몸을 기댄 벽 쪽으로 급격한 수직 회전을 한다. 이 나선 움직임으로 화면은 다음날 아침 재판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법정에 안내되는 매니의 모습으로 전환된다. 히치콕은 흔히 이와 같은 전환으로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주관적 감정과 인상을 분석한다. 위에 말한 카메라 움직임으로 그는 순수하게 신체적 요소만 전달한다. 지친 매니가 두 눈을 꼭 감을 대의 눈꺼풀의 수축, 1초도 안되는 순간이지만 그것이 동공을 누르는 힘.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망막에도 무수한 형태들을 명멸하게 만든다. 이런 효과는 특별한 카메라 기술 없이는 연출하기 힘든 것이다. 기법만 있는 영화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여 우리의 감각기관에 침투, 의미를 형성하는 영화는 모든 것이다.
<이창> 이후 히치콕은 이 같은 '표피' 효과를 진지하게 발전시켜 왔다. 그가 플롯 전개를 잠시 미루고 이런 효과를 삽입할 때 그는 작은 경련 하나까지도 잡힐 듯이 절묘하게 포착한다. 이런 네오리얼리즘적 기법은 그러나 결코 목적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과의 싸움에 직면했을 때 말보다 많은 것을 말해주는 육체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주위를 둘러 볼 수 있다는 것은 자유롭다는 뜻이다. 삶의 재현인 영화는 그래서 주변을 둘러보는 인물을 그린다. <누명 쓴 사나이>가 자신의 다른 작품들과 다르다는 히치콕의 선언은 옳았다. <누명 쓴 사나이>는 그의 이전 작품들과 정반대다. 서스펜스는 더 이상 '곧 일어날 것 같은 사건이 정말 발생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지 않고(<너무 많이 알고 있는 사나이>에서 그랬듯이), 반대로 일어날까봐 두려운 사건이 결국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누명 쓴 사나이>에서 공포는 서스펜스 자체가 환영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로버트 버크의 아름다운 촬영이 돋보이는, 매니를 법원으로 호송하는 경찰차가 현수교를 지나는 장면은 특히 주목을 받는다. 거대한 형교가 던지는 그림자 속에 덜컹거리며 지나가는 조그만 실루엣은 묘하게도 유령의 나라에 도착한 노스페라투의 마차를 연상시킨다. 아닌 게 아니라 매니는 지금 자기가 유령이 된 건지 다른 사람들이 모두 유령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있다. 그가 법정에서 다시 아내의 얼굴을 보게 되기까지 호송차 안에서 그의 눈을 스쳐간 거리들은 모두 신기루 같기만 하다. 아니, 아내마저도 어쩌면 신기루 같다. 매니가 7천5백 달러의 보석금을 낼 수 없어 보석을 기각 당하는 동안 로즈는 방청석 뒷자리에 조그맣게 보일 뿐이다.
매니는 지방 검사를 만나기 위해 다른 죄수들과 같이 다시 롱아일랜드의 교도소로 보내진다. 모멸과 상처, 이것이 2장과 3장을 요약하는 도스토예프스키적 부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잡범들과 다시 감옥에 구치되며 이야기는 계속된다.
악몽은 이제 현실이 되었다. <나는 고백한다>에서 로건 신부는 입을 열기를 거부했다. <누명 쓴 사나이>의 매니는 아예 말 자체를 불신하게 된다. 처음에는 수치심에서, 다음에는 소용 없음을 알기 때문에. 유치장에서 그는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 그는 오직 앞 사람의 발만 본다. 히치콕은 여기서 <나는 고백한다>에서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오토 E.하세에게 접근할 때 사용한, 후진 트랙킹에서 리버스 앵글 전진 트랙킹으로 연결되는 테크닉을 다시 한 번 사용한다. 보험회사 여직원이 타이피스트의 어깨 너머로 매니를 바라보는 장면도 같은 영화에서 칼 말덴이 부하의 어깨너머로 몽고메리 클리프트와 이야기를 나누는 앤 박스터를 지켜보던 것과 같은 이펙트다. 또 한 장면은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사나이>에서 반복한 것으로, 매니가 경찰이 불러준 메모를 다시 읽다 자신이 범인과 같은 오철을 범했음을 깨닫는 장면에 나온 횡적 클로즈업 트랙킹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세 테크닉이 앞의 영화에서들과 달리 비교적 덜 결정적인 순간에 쓰였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 효과는, 그 튀지 않는 위치 때문에, 오히려 더 강렬해졌다. 히치콕이 어떤 장치가 자아낼 효과를 사전에 완전히 파악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쓴 적이 없다는 증거로 이보다 나은 예는 없다. 그는 이제 자신이 발견한 테크닉들을 예술적 전제로서가 아니라 그 완결로 사용하고 있다.
매니는 보석으로 출감한다. 보석금을 댄 것은 처남으로, 밖에서 로즈와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부터 로즈는 이야기의 중심 인물이 된다. 히치콕은 이를 역시 단일 쇼트로 보여준다. 매니가 헤어졌던 아이들과 만나 기뻐하는 동안 로즈는 변호사에게 전화를 건다. 그 동안 카메라는 그 위를 내내 머뭇거린다. 거의 망설이는 것처럼. 여기서 우리는 <의혹의 전망차>의 감독 알프레드 히치콕의 '죄악(guilt)'의 테마가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여기서 죄악의 문제는 무고한 사람이 남의 죄를 뒤집어 썼다는 사실이 아니라 매니의 자유와 로즈의 자유를 맞바꾼다는 사실에 존재한다. 매니에 대한 고소가 사실 무근이므로 <누명 쓴 사나이>에서는 사실 죄악의 문제가 제기될 여지가 없었다. 문제는 오히려 '결백함(innocence)'이었다.
'The Wrong Man(애꿎은 남자)'이 'The Wrong Woman(애꿎은 여자)'이 된 것이다. 히치콕이 다른 무엇보다 '남녀'를 그리는 감독이란 점을 잊지 말자. 로즈의 순수함(innocence)은 전형적 형태의 순진함(naivety)이다. 그녀는 남편의 결백을 한 순간이라도 의심한 자신을 죄인으로 생각할만큼 순수했다. 그런 의심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일어나지 않을 일을 두려워한 데 대해 그녀는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순진함이란 때로 아주 모순된 행동을 불러일으킨다. 로즈의 순진성(아니, 차라리 어리석음)은 그녀를 정신 분열로 몰아가는 유일한 동기다. 남편이 돌아오지 않아 걱정하던 로즈가 경찰의 전화를 받는 장면을 생각해보자. 매니가 무장 강도 혐의로 체포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녀가 처음 보인 반응은 놀라운 것이다. "뭔가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어요." 그녀는 지금까지 생각도 못해본, 아니 앞으로도 그런 일을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입 밖에 낸 순간 의심은 이미 싹을 틔운다. 순진함은 때로 섣부른 잔인함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로즈는 이 섣부름의 대가를 광기로 치른다.
일찍이 괴테와 발작이 격정에 눈이 가려 몰락에 이르는 이런 히로인을 묘사한 바 있다. 로즈는 변호사가 요구하는 알리바이를 찾기 위해 남편과 함께 최선을 다한다. 사건이 있던 날이 휴일이었으므로 부부는 함께 카드놀이를 한 사람을 미친듯이 찾아 다닌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로즈는 자신이 정말 남편을 믿어서라기보다는 의무감에서 돕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점점 확인하게 된다. 4장은 로즈를 속에서부터 갉아먹고 있던 이런 의혹의 충격적 확인으로 끝난다.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었던 목격자가 죽었음이 밝혀지자 로즈는 히스테릭한 웃음을 터뜨린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많은 일들이 개연성에 반해 발생하는 것이다. 로즈가 회한에서 미쳤다면, 그것은 광기가 논리에 반해 발생하기 때문이다.
<누명 쓴 사나이>의 핵심적 장면들은 모두, 극적인 수준에서 그 정서적 강도를 배가시키고 내러티브 수준에서 그 의미를 정당화하는 '대응쌍'을 갖고 있다. 로즈의 히스테릭한 웃음은 사라진 목격자 소유의 아파트에 사는 여자 아이들의 웃음과 호응하고, 로즈가 매니를 때리는 장면은 그녀가 이 세상에서 행복이 얼마나 얻기 힘든 것인가를 농담처럼 말하던 도입부 장면과 호응한다. 상황의 자의성은 연출에 의해 강조된다. 폰다가 브러시로 맞는 장면은 사건의 시작과 끝만 보여주는 네 개의 고속 쇼트로 처리된다. 브러시를 든 로즈, 매니, 깨진 거울, 매니의 상처난 이마, 발레이 가까운 이 몽타주는 그러나 많은 것을 말해준다. 테크닉의 개발은 '스타일'로 승화될 수 있는 형식적 완성도가 따르지 않을 때 아무 의미가 없음을 히치콕은 보여준다.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말로는 이미 답을 내린바 있다. "형식이 스타일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변호사 오코너가 마치 페리 메이슨처럼 원고측 증인들을 심문하는 동안 매니가 테이블 밑으로 쥐고 있는 염주의 클로즈업. 끝까지 디테일을 물고 늘어진 끝에 오코너는 목적을 달성한다. 재판의 전개 양상에 질린 배심원단은 휴정을 요청하고, 오코너는 무효 심리를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인정된다. 두 번째 기적의 징조다.
여전히 보석 상태인 매니는 집으로 돌아간다. 로즈가 없는 동안 그의 어머니가 살림을 보살피고 있다. 그는 재판이 중단되어 더욱 불안하다. 강도혐의는 차라리 자신이 범인인 것보다 더 그를 짓누르고 있다. 그러나 그는 신께 도움을 청하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어머니는, 도움을 청할 게 아니라 이겨낼 힘을 청하라고 말한다. 스토크 클럽에 나갈 준비를 하면서 그는 어머니의 말을 되새겨본다. 넥타이를 매는 매니의 클로즈업. 예수 그림의 클로즈업. 그림을 바라보는 매니의 클로즈업. 마지막 클로즈업은 다음 순간 이중 인화로 바뀐다. 매니의 얼굴 너머로 레인코트에 펠트 모자 차림의 남자 모습이 떠오른다. 남자는 얼굴이 매니의 클로즈업된 얼굴과 포개질때가지 쭉 걸어온다. 그의 모습은 매니와 거의 흡사하다. 그의 턱은 매니의 턱과 겹쳐지고, 그의 코는 매니의 코와 하나가 된다. 순간, 이중 인화는 사라진다. 화면에 남은 것은 진범의 얼굴로, 팬과 함께 카메라는 또 다시 무장강도를 벌이는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같은 장면 전환은 더 이상 줄거리를 연결하는 경첩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드라마 자체다. 이윽고 가게 안주인의 기지로 체포된 진범이 경찰서에 끌려온다. 매니를 심문한 형사는 복도를 지나 경철서를 나서다가 계단에서 멈춰선다. 매니의 결백을 깨달은 것이다. "어때, 매니?" 형사는 묻는다. "좋습니다."매니는 밝게 웃으며 대답한다. <누명 쓴 사나이>의 라스트 씬은 병원이다. 혐의가 풀렸다는 소식에도 불구하고 로즈의 상태는 호전될 기미가 없다. "기적을 기대했는데." 좌절한 매니가 중얼거린다. "기적은 일어나요." 간호사가 대꾸한다. "기다리는 법만 배우면 되요." 2년 후. 에필로그는 로즈가 완쾌되어 가족의 품에 돌아갔음을 알린다.
해석은 각자의 몫이다.
스토크 클럽은 널리 알려진 것처럼 뉴욕에서 가장 세련된 만남의 장소이다. 에어컨, 자욱한 시가 연기, 선명한 립스틱... 그러나 크레딧 너머로 차츰 비어가는 실내에 자리한 카메라는 그곳의 스타나 백만장자를 보고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노곤한 블루스를 연주하는 평범한 작은 악단 쪽으로 다가간다. 스토크 클럽은 문을 닫고, 크리스토퍼 발레스테로(헨리 폰다)는 연주를 마치고 더블 베이스를 챙겨 도어맨에게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선다. 이 때 화면의 앵글 때문에, 잠시 두 형사가 그를 따라오는 것처럼 보인다. 잠시. 그러나 다음 순간 형사들은 그의 옆을 지나쳐 앞서 가기 시작한다. 이 쇼트로 히치콕은 발레스트레로를 기다리고 있는 구속과 더불어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게 될 '운명'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각인시킨다.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사나이>의 히치콕에게 심리학은 전혀 관심 밖이다. 중요한 것은 운명의 반전이다. 게임을 즐기고, 언제나 공정하게 게임하는 히치콕은 사실 크레딧이 나오기 전부터 관객에게 경고를 했다. 강렬한 콘트라스트의 조명 속에 그의 땅딸한 실루엣이 나타나 몇 걸음 떼다 멈춘다. 낮고 온건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이 영화는 내 다른 작품과 다릅니다. 서스펜스 같은 건 없습니다. 오직 사실뿐입니다." 그러나 이 말 속엔 또 다른 뜻이 담겨 있다. <누명 쓴 사나이>의 서스펜스는 운명 자체다. 이 영화의 주제는 사건의 예측 불가능함이 아니라 그 가능함, '그럴 수 있음'이다. <누명 쓴 사나이>에서 히치콕은 모든 쇼트, 모든 전환, 모든 화면 구성을 아무런 꾸밈 없이, 철저히 논리적으로 관리한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원하는 것은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다.
발레스트레로(친구들에겐 '매니'로 불리는)는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 잠을 잔다. 열차 안에서 그는 신문의 경마란을 본다. 아내 로즈가 물어보면 그는 경마 자체보다 머릿속에서 셈을 해보는 게 즐거워서라고 대답한다. 실제로 그는 계산하기를 좋아한다. 아내에게 말했듯이, 그것이 음악가로서 그가 하는 일이니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발레스트레로가 읽는 신문 하나도 의미 없이 들어간 게 없다는 것이다. 히치콕은 평생 불필요한 쇼트는 써본 적이 없는 감독이다. 가장 평범해 보이는 쇼트조차 어떤 식으로든 플롯에 기여하며 인상파 특유의 붓 터치가 인상파 회화를 풍성하게 한 것처럼 텍스트를 풍성하게 만든다. 히치콕 쇼트는 전체적인 맥락에서 바라볼 때만 의미를 획득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신문에 난 자동차 광고를 보게 된다. 그것은 젊은 여자가 두 명의 아이들과 차를 둘러싸고 있는 그림이다. 발레스트레로는 이를 보고 미소를 짓는데, 나중에 우리는 그에게 아내와 두 아이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또 다른 (그리고 더 훌륭한) 예는 신문에 나온 보험 회사 광고다. 이 쇼트는 사랑니 때문에 고생하는 로즈가 치과에 갈 돈 백 달러를 부탁하자 발레스트레로가 왜 갑자기 보험을 떠올리게 되는지 설명해준다. 칼 드레이어는 물론이고 무르나우에 필적하는, 대여섯 번 정도 되는 이 영화 최고의 클로즈업 중 첫번째는 그가 로즈와 얘기를 끝내고 로즈가 잠자리에 든 직후 나온다. 가볍고 사랑스럽게 사랑니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은 로즈는 곧 세상에 자기 같은 아내가 있느냐며 치료비를 부탁하고 인사를 한 뒤 잠자리에 든다. 생각에 빠진 헨리 폰다의 반응 쇼트가 긴 클로즈업으로 나온다. 이와 관련해서 비슷한 클로즈업이 끝에서 두 번째 릴에도 나오는데, 정신과 의사와 상담을 마친 발레스트레로가 미친 로즈를 제일 좋은 병원에 보내기로 결심하는 장면에서다. 시간의 경과를 적극적으로 포착한 이 두 클로즈업의 통렬한 아름다움은 삶의 본질인, 일상에 엄습하는 절박함에 대한 이해에서 나온다. 짧은 시간이지만 영원처럼 느껴지는 이 클로즈업에 잡힌 폰다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은 <향연>에서 플라톤이 묘사한 청년 알키비아데스의 아름다움에 비견된다. 그 기준은 오직 한점 꾸밈없는 사실성이다.
<누명 쓴 사나이>는 가장 놀라운 모험담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장 완벽하고 모범적인 다큐멘터리이기 때문이다. 위 두 클로즈업은 윤리적으로 모두 똑같이 끝난다. 후자의 경우는 발레스트레로가 의사에게 "제일 좋은 병원을 찾아주시오."라고 말하며 끝난다. 로즈를 미치게 만든 것이 두 사람의 행복에 대한 불안이었기 때문에 그는 더욱 아내를 사랑한다. 서로에 대한 애정의 다시 없는 증거인 것이다. 전자는 카메라가 베라 마일즈의 목덜미 깊숙이 키스를 하는 폰다를 팬하면서 끝이난다.
<누명 쓴 사나이>는 윤리적 일화인 동시에 미장센 강의다. 방금 든 예 외에도 히치콕이 몇개의 클로즈업에 해당하는 장면을 하나의 쇼트에 잡아 따로따로는 불가능했을 파워를 달성하는 것을 여러 번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를 그가 의도적으로, 꼭 필요한 순간에만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필요할 땐 그 반대도 시도한다. 한 쇼트에 해당하는 장면을 일련의 고속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는... 지문날인 장면이 바로 그렇다. 그는 이 수치의 상징과도 같은 장면을 오싹하리만큼 리얼하게 보여준다. 엄지손가락, 검지, 가운뎃손가락에 차례로 잉크를 바른다. 경찰의 얼굴, 폰다의 넋 나간 얼굴, 카드에 지문을 찍으면서 경찰이 폰다의 팔목을 비튼다. 이 모든 것이 빠르게 오버랩되는 쇼트들로 마치 <아카딘 씨> 같은 강박적 몽타주를 구성한다.
다음에 이어지는 완만한 전개(구치소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소지품을 비우는 등의)는 매니가 처한 육체적, 정신적 탈진 상태를 보여준다. 여기서부터 히치콕이, 특히 매니가 감방에 들어서는 장면에서, 철저히 단순한 기본 테크닉에 의존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히치콕 같은 카메라 비르투오소가 이렇게 과시 없는 스타일을 애용한다는 것은 그의 연출가적 재능에 대한 반증이다. 관객이 이미 매니의 악몽을 함께 했는데, 더 이상의 과장이나 미화는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는 브레송처럼 단지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다. 감방에 들어선 매니는 먼저 침대를 보고(침대의 리버스 앵글), 다음으로 세면대를(세면대의 리버스 앵글), 그리고 위를(천장과 벽의 리버스 앵글), 마지막으로 철창을 본다(철창의 리버스 앵글). 눈에는 들어오지만, 머리에는 들어오지 않는다.(형사 반장은 그 반대였다. 그는 눈으로 보지 않고 머리로 본다.) 듣기만 할 뿐 이해하지는 못하는 법정에서처럼. 알프레드 히치콕은 여기서, 의식이란 기본 데이터를 전달하는 데 영화가 철학이나 소설보다 얼마나 더 효과적인 수단인가를 여실히 증명한다. 매니는 지친 듯이 벽에 몸을 기댄다. 모멸에 취한 듯이. 그는 정신을 가다듬으려는 듯 두 눈을 꼭 감는다. 미디엄 쇼트로 그를 잡은 카메라는 다음 순간, 그를 끼고 그가 몸을 기댄 벽 쪽으로 급격한 수직 회전을 한다. 이 나선 움직임으로 화면은 다음날 아침 재판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법정에 안내되는 매니의 모습으로 전환된다. 히치콕은 흔히 이와 같은 전환으로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주관적 감정과 인상을 분석한다. 위에 말한 카메라 움직임으로 그는 순수하게 신체적 요소만 전달한다. 지친 매니가 두 눈을 꼭 감을 대의 눈꺼풀의 수축, 1초도 안되는 순간이지만 그것이 동공을 누르는 힘.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망막에도 무수한 형태들을 명멸하게 만든다. 이런 효과는 특별한 카메라 기술 없이는 연출하기 힘든 것이다. 기법만 있는 영화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여 우리의 감각기관에 침투, 의미를 형성하는 영화는 모든 것이다.
<이창> 이후 히치콕은 이 같은 '표피' 효과를 진지하게 발전시켜 왔다. 그가 플롯 전개를 잠시 미루고 이런 효과를 삽입할 때 그는 작은 경련 하나까지도 잡힐 듯이 절묘하게 포착한다. 이런 네오리얼리즘적 기법은 그러나 결코 목적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과의 싸움에 직면했을 때 말보다 많은 것을 말해주는 육체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주위를 둘러 볼 수 있다는 것은 자유롭다는 뜻이다. 삶의 재현인 영화는 그래서 주변을 둘러보는 인물을 그린다. <누명 쓴 사나이>가 자신의 다른 작품들과 다르다는 히치콕의 선언은 옳았다. <누명 쓴 사나이>는 그의 이전 작품들과 정반대다. 서스펜스는 더 이상 '곧 일어날 것 같은 사건이 정말 발생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지 않고(<너무 많이 알고 있는 사나이>에서 그랬듯이), 반대로 일어날까봐 두려운 사건이 결국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누명 쓴 사나이>에서 공포는 서스펜스 자체가 환영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로버트 버크의 아름다운 촬영이 돋보이는, 매니를 법원으로 호송하는 경찰차가 현수교를 지나는 장면은 특히 주목을 받는다. 거대한 형교가 던지는 그림자 속에 덜컹거리며 지나가는 조그만 실루엣은 묘하게도 유령의 나라에 도착한 노스페라투의 마차를 연상시킨다. 아닌 게 아니라 매니는 지금 자기가 유령이 된 건지 다른 사람들이 모두 유령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있다. 그가 법정에서 다시 아내의 얼굴을 보게 되기까지 호송차 안에서 그의 눈을 스쳐간 거리들은 모두 신기루 같기만 하다. 아니, 아내마저도 어쩌면 신기루 같다. 매니가 7천5백 달러의 보석금을 낼 수 없어 보석을 기각 당하는 동안 로즈는 방청석 뒷자리에 조그맣게 보일 뿐이다.
매니는 지방 검사를 만나기 위해 다른 죄수들과 같이 다시 롱아일랜드의 교도소로 보내진다. 모멸과 상처, 이것이 2장과 3장을 요약하는 도스토예프스키적 부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잡범들과 다시 감옥에 구치되며 이야기는 계속된다.
악몽은 이제 현실이 되었다. <나는 고백한다>에서 로건 신부는 입을 열기를 거부했다. <누명 쓴 사나이>의 매니는 아예 말 자체를 불신하게 된다. 처음에는 수치심에서, 다음에는 소용 없음을 알기 때문에. 유치장에서 그는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 그는 오직 앞 사람의 발만 본다. 히치콕은 여기서 <나는 고백한다>에서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오토 E.하세에게 접근할 때 사용한, 후진 트랙킹에서 리버스 앵글 전진 트랙킹으로 연결되는 테크닉을 다시 한 번 사용한다. 보험회사 여직원이 타이피스트의 어깨 너머로 매니를 바라보는 장면도 같은 영화에서 칼 말덴이 부하의 어깨너머로 몽고메리 클리프트와 이야기를 나누는 앤 박스터를 지켜보던 것과 같은 이펙트다. 또 한 장면은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사나이>에서 반복한 것으로, 매니가 경찰이 불러준 메모를 다시 읽다 자신이 범인과 같은 오철을 범했음을 깨닫는 장면에 나온 횡적 클로즈업 트랙킹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세 테크닉이 앞의 영화에서들과 달리 비교적 덜 결정적인 순간에 쓰였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 효과는, 그 튀지 않는 위치 때문에, 오히려 더 강렬해졌다. 히치콕이 어떤 장치가 자아낼 효과를 사전에 완전히 파악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쓴 적이 없다는 증거로 이보다 나은 예는 없다. 그는 이제 자신이 발견한 테크닉들을 예술적 전제로서가 아니라 그 완결로 사용하고 있다.
매니는 보석으로 출감한다. 보석금을 댄 것은 처남으로, 밖에서 로즈와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부터 로즈는 이야기의 중심 인물이 된다. 히치콕은 이를 역시 단일 쇼트로 보여준다. 매니가 헤어졌던 아이들과 만나 기뻐하는 동안 로즈는 변호사에게 전화를 건다. 그 동안 카메라는 그 위를 내내 머뭇거린다. 거의 망설이는 것처럼. 여기서 우리는 <의혹의 전망차>의 감독 알프레드 히치콕의 '죄악(guilt)'의 테마가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여기서 죄악의 문제는 무고한 사람이 남의 죄를 뒤집어 썼다는 사실이 아니라 매니의 자유와 로즈의 자유를 맞바꾼다는 사실에 존재한다. 매니에 대한 고소가 사실 무근이므로 <누명 쓴 사나이>에서는 사실 죄악의 문제가 제기될 여지가 없었다. 문제는 오히려 '결백함(innocence)'이었다.
'The Wrong Man(애꿎은 남자)'이 'The Wrong Woman(애꿎은 여자)'이 된 것이다. 히치콕이 다른 무엇보다 '남녀'를 그리는 감독이란 점을 잊지 말자. 로즈의 순수함(innocence)은 전형적 형태의 순진함(naivety)이다. 그녀는 남편의 결백을 한 순간이라도 의심한 자신을 죄인으로 생각할만큼 순수했다. 그런 의심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일어나지 않을 일을 두려워한 데 대해 그녀는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순진함이란 때로 아주 모순된 행동을 불러일으킨다. 로즈의 순진성(아니, 차라리 어리석음)은 그녀를 정신 분열로 몰아가는 유일한 동기다. 남편이 돌아오지 않아 걱정하던 로즈가 경찰의 전화를 받는 장면을 생각해보자. 매니가 무장 강도 혐의로 체포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녀가 처음 보인 반응은 놀라운 것이다. "뭔가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어요." 그녀는 지금까지 생각도 못해본, 아니 앞으로도 그런 일을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입 밖에 낸 순간 의심은 이미 싹을 틔운다. 순진함은 때로 섣부른 잔인함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로즈는 이 섣부름의 대가를 광기로 치른다.
일찍이 괴테와 발작이 격정에 눈이 가려 몰락에 이르는 이런 히로인을 묘사한 바 있다. 로즈는 변호사가 요구하는 알리바이를 찾기 위해 남편과 함께 최선을 다한다. 사건이 있던 날이 휴일이었으므로 부부는 함께 카드놀이를 한 사람을 미친듯이 찾아 다닌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로즈는 자신이 정말 남편을 믿어서라기보다는 의무감에서 돕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점점 확인하게 된다. 4장은 로즈를 속에서부터 갉아먹고 있던 이런 의혹의 충격적 확인으로 끝난다.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었던 목격자가 죽었음이 밝혀지자 로즈는 히스테릭한 웃음을 터뜨린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많은 일들이 개연성에 반해 발생하는 것이다. 로즈가 회한에서 미쳤다면, 그것은 광기가 논리에 반해 발생하기 때문이다.
<누명 쓴 사나이>의 핵심적 장면들은 모두, 극적인 수준에서 그 정서적 강도를 배가시키고 내러티브 수준에서 그 의미를 정당화하는 '대응쌍'을 갖고 있다. 로즈의 히스테릭한 웃음은 사라진 목격자 소유의 아파트에 사는 여자 아이들의 웃음과 호응하고, 로즈가 매니를 때리는 장면은 그녀가 이 세상에서 행복이 얼마나 얻기 힘든 것인가를 농담처럼 말하던 도입부 장면과 호응한다. 상황의 자의성은 연출에 의해 강조된다. 폰다가 브러시로 맞는 장면은 사건의 시작과 끝만 보여주는 네 개의 고속 쇼트로 처리된다. 브러시를 든 로즈, 매니, 깨진 거울, 매니의 상처난 이마, 발레이 가까운 이 몽타주는 그러나 많은 것을 말해준다. 테크닉의 개발은 '스타일'로 승화될 수 있는 형식적 완성도가 따르지 않을 때 아무 의미가 없음을 히치콕은 보여준다.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말로는 이미 답을 내린바 있다. "형식이 스타일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변호사 오코너가 마치 페리 메이슨처럼 원고측 증인들을 심문하는 동안 매니가 테이블 밑으로 쥐고 있는 염주의 클로즈업. 끝까지 디테일을 물고 늘어진 끝에 오코너는 목적을 달성한다. 재판의 전개 양상에 질린 배심원단은 휴정을 요청하고, 오코너는 무효 심리를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인정된다. 두 번째 기적의 징조다.
여전히 보석 상태인 매니는 집으로 돌아간다. 로즈가 없는 동안 그의 어머니가 살림을 보살피고 있다. 그는 재판이 중단되어 더욱 불안하다. 강도혐의는 차라리 자신이 범인인 것보다 더 그를 짓누르고 있다. 그러나 그는 신께 도움을 청하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어머니는, 도움을 청할 게 아니라 이겨낼 힘을 청하라고 말한다. 스토크 클럽에 나갈 준비를 하면서 그는 어머니의 말을 되새겨본다. 넥타이를 매는 매니의 클로즈업. 예수 그림의 클로즈업. 그림을 바라보는 매니의 클로즈업. 마지막 클로즈업은 다음 순간 이중 인화로 바뀐다. 매니의 얼굴 너머로 레인코트에 펠트 모자 차림의 남자 모습이 떠오른다. 남자는 얼굴이 매니의 클로즈업된 얼굴과 포개질때가지 쭉 걸어온다. 그의 모습은 매니와 거의 흡사하다. 그의 턱은 매니의 턱과 겹쳐지고, 그의 코는 매니의 코와 하나가 된다. 순간, 이중 인화는 사라진다. 화면에 남은 것은 진범의 얼굴로, 팬과 함께 카메라는 또 다시 무장강도를 벌이는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같은 장면 전환은 더 이상 줄거리를 연결하는 경첩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드라마 자체다. 이윽고 가게 안주인의 기지로 체포된 진범이 경찰서에 끌려온다. 매니를 심문한 형사는 복도를 지나 경철서를 나서다가 계단에서 멈춰선다. 매니의 결백을 깨달은 것이다. "어때, 매니?" 형사는 묻는다. "좋습니다."매니는 밝게 웃으며 대답한다. <누명 쓴 사나이>의 라스트 씬은 병원이다. 혐의가 풀렸다는 소식에도 불구하고 로즈의 상태는 호전될 기미가 없다. "기적을 기대했는데." 좌절한 매니가 중얼거린다. "기적은 일어나요." 간호사가 대꾸한다. "기다리는 법만 배우면 되요." 2년 후. 에필로그는 로즈가 완쾌되어 가족의 품에 돌아갔음을 알린다.
해석은 각자의 몫이다.
# by | 2008/03/28 17:21 | 영화자료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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