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09일
빌리 와일더와 할리우드 (3) [잃어버린 주말]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미국은 비록 승리했지만 엄청난 정치적 경제적 후유증에 시달리게 된다. 수많은 물자와 인명을 유럽과 아시아의 양편에서 쏟아 부우면서 결국 미국이 손아귀에 움켜쥔 것은 전리품의 황금이 아니라 불타버린 잔해의 찌꺼기들이었기 때문이다. 나치 독일은 시가전과 공습으로 잿더미가 돼버린 지 오래였고 일본은 오랜 전시체제하의 배급경제로 극도의 내핍생활을 해야 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미국에는 전쟁이 끝난 후 귀환병들이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기업도 타격을 받은 상태였다. 전시 물자를 대느라 정부와 군사제품 수의계약을 맺었던 소수의 대기업은 살아남았지만 대부분 다른 기업들은 민간 소비가 억제되는 전시 경제 구조 하에서 자연도산 해버린 상태였다. 결국 2차 대전이 끝났어도 미국은 모두가 가난한 상태였고 노동자들의 임금이 오를 수 없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집에서 먹고 마실 설탕이나 커피도 귀했으며 전자 석유 화학제품 같은 생필품도 귀했지만 그런 물건을 만들 공장도 없었고 귀환병들에게 돌아갈 일자리조차 되지 않은 상태였다.
들어가며
알코올 중독자를 그린 영화를 꼽자면 마이크 피기스 감독의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나 베티 토마스 감독의 <28일 동안>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알코올 중독자의 피폐한 내면과 처참한 자기투쟁 과정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작품으로 빌리 와일더가 연출하고 레이 밀랜드가 열연한 <잃어버린 주말>에 비길 만 한 영화는 다시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또한 이후 만들어진 알코올 중독자의 삶이 나오는 모든 영화들은 이 영화에 얼마간의 빚을 지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잃어버린 주말>은 알코올 중독 영화에 관한 전범(典範)으로 자리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1945년의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인 빌리 와일더의 〈잃어버린 주말 The Lost Weekend>은 알코올 중독 문제를 부각시킴으로써 ‘의미 있는’ 주제를 좋아하는 아카데미의 입맛을 맞추기도 했지만, 이 영화에서 드러나는 전쟁 후의 우울한 분위기는 이 시대 사람들만이 공감할 수 있는 독특한 것이기도 했다. (이 작품은 1946년 열린 제 1회 칸 영화제에서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무방비 도시>와 더불어 그랑프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 영화에 대한 미국내 분위기가 우호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주류협회는 이 영화를 사장시키기 위해 파라마운트사에 500만 달러를 제시한 반면, 금주단체들은 이 영화가 오히려 음주를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를 나타내며 항의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당시로는 드문 상업적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성공한 작품이 <잃어버린 주말>이다.

Opening_ 황홀하고 완벽한 원의 세계 속으로
영화가 시작되면 뉴욕 3번가에 위치한 공동주택의 창문이 보이고 외벽에 매달린 술병과 함께 주인공 ‘돈 버냄’이 등장하는데, 그는 동생인 ‘윅’과 아버지의 농장에서 주말을 보내기 위해 짐을 꾸리는 중이다. 지독한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연인 ‘헬렌’과 동생에게 불신만 안겨주며 무위도식하는 그에게 주말 농장에서의 며칠간이 지옥 같을 게 빤한 것은 도무지 술을 마실 수 도 없고, 무능력한 패배자인 자신을 알아보는 이들의 눈초리를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동생과 헬렌이 연주회에 간 후 그는 파출부에게 줄 10달러를 손에 쥐고서 단골 술집 ‘넷의 바 (Nat's Bar)’로 향하게 된다. 이때부터 영화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술에 의존한 채 살아가는 알코올 중독자의 처절한 자기투쟁의 기록을 지독할 정도로 사실성 넘치게 묘사하며 동시대인들을 위무하고 계몽하게 된다.
<잃어버린 주말>은 빌리 와일더의 40년대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한정된 공간에서 단조로운 동선으로도 충분히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음을 증명해준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의 공간이라고는 돈의 집과 넷의 바를 오가는 반복이 이어질 뿐이며 그 밖의 장소라고 해봐야 오페라 하우스와 병원 장면이 고작일 정도로 극단적으로 짧은 동선에 의존하면서 주인공의 행동반경을 제약하게 된다. 그러니 이 궤적에 놓인 주인공에게 강박증과 금주에 따른 금단현상이 극심해질 것은 빤할 일일 터이다. 또한 이 영화는 대형 스튜디오의 지원이 없었기에 소규모 제작비로 만들어졌으며, 때문에 배우의 연기와 감독의 연출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극복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것은 1990년대 뉴욕 인디펜던트무비 붐의 효시로 볼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이중 배상>에서의 필름느와르 스타일과 거리를 두며 <선셋 대로>에서 보여준 할리우드의 자기반영적 요소도 찾아볼 수 없지만, 단출한 시공간을 활용하며 일상의 단면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와일더의 기품이 배어있다는 점에서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고 하겠다. 따라서 <잃어버린 주말>에서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배우가 공간을 지배하는 방식과 더불어 인물들의 관계망에서 읽혀지는 당대 미국사회의 병리적 현상이다.
와일더식 공간지배와 분할
영화의 주인공 돈은 코넬 대학 재학 중 학회지를 만들며 두각을 나타낸 타고난 작가이다. 자신의 천재적 능력을 과신하여 대학을 중퇴한 후 몇 편의 소설에서 성공을 맛보았지만 이내 좌절하고 글쓰기를 포기한 인물이다. 그가 애인 헬렌을 처음 만나는 곳은 ‘라 트라비아타’가 공연되는 어느 오페라극장이다. 이후 헬렌의 부모를 만나기로 한 돈은 약속을 어기고 도망치다시피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처지가 볼품없고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것 때문이다. 영화를 통틀어 유일하게 플래시백으로 구성된 두 개의 시퀀스는, 동생이 고향집으로 떠난 다음 날 넷의 바에서 진술하는 내용이며 자신이 구상중인 소설 《술병(Bottle)》의 스토리의 일부이기도 하다. 즉 자전적 소설을 술집 주인에게 들려주는 가운데 영화는 집과 넷의 바를 오가는 돈의 모습을 통해 현실과 허구 사이에서 허우적대는 알코올 중독자의 모습을 가감 없이 그려내게 된다. 그러므로 3일의 시간을 관통하는 알코올 중독자의 처절한 투쟁기가 공간의 상징성을 각기 달리할 때, 관객은 때론 윅과 헬렌의 시선으로 때론 넷과 글로리아의 시선으로 돈의 현실을 관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와일더는 두 개의 공간을 현실과 상상의 장소로 구분하고, 공간을 지배하는 인물들 역시 같은 방식으로 나누어 놓으면서 대립각을 형성시킨다. 하지만 이러한 대립의 이미지는 상반된 의미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즉 양자의 상호보완이 가능하며 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는 장치로 엮어놓고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 보여 지는 두 개의 대표적 공간은 돈의 집과 넷의 바다. 공식적으로 술을 마실 수 없는 돈의 집은 현실의 장소이며 돈만 주면 술을 마실 수 있는 넷의 바는 환상의 장소로 볼 수 있다. 집에 속한 인물인 동생 윅과 헬렌은 돈의 알코올중독에 지쳤음에도 여전히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 주는 이들이고, 넷의 바에서 만나는 주인 넷과 여급 글로리아는 그의 단점을 알면서도 포용하거나 따끔한 비판도 서슴지 않은 인물들이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가족이라 할 수 있는 윅과 헬렌을 자신을 구속하고 훈계하는 귀찮은 존재로 여기는 반면 넷과 글로리아는 술과 함께 할 수 있는 보다 친근하고 이상적인 유사가족의 이미지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또한 엄격하고 합리주의자의 면모를 지닌 동생 윅보다 투덜대면서도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주는 넷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도 이런 이유이다. 마찬가지로 상류층이며 정숙미를 갖춘 헬렌보다 비천하지만 살갑게 다가오는 여급 글로리아에게 친절한 눈빛을 보내는 행위 역시 일견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알코올중독자가 금단현상을 이기지 못해 뛰어 들어간 공간 속에 술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이지만, 영화에서 돈은 단순히 술에 대한 욕구뿐 아니라 현실에 대한 압박감에서 해방되기 위해 또는 금주에 대한 강박증을 이겨내려는 목적으로 넷의 바를 찾는 다는 점이다.

전후 미국사회의 우울증
1921년 현진건의 소설 《술 권하는 사회》의 주인공인 남편은 자신에게 술을 권하는 것은 화증도 하이칼라도 아니고 현 조선사회라고 말한다. 남편은 조선의 현실을 비판하며 그런 사회에서 자신이 할 일이란 주정꾼 노릇밖에는 할 일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내가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자 무지에 답답해하며 집을 나가버리고, 아내는 절망한 어조로 중얼 거린다.
“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
마찬가지로 엄격히 말하자면 글쓰기를 포기한 돈이 동생 윅에게 얹혀살면서부터, 동생이 주는 담배 값 55센트를 받는 상황이 불러온 강박증이 그에게 끊임없이 술 마시도록 권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믿음이 유일한 방법”이라 믿는 헬렌의 극진한 애정과 “6년 동안 할 만큼 다 했다”고 푸념하는 동생 윅에 대한 과도한 강박관념이 빚어낸 비극적 일상은 죽기 전에는 멈출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어 나를 술 마시게 한다” “두 명의 돈이 있는데, 술 마시는 돈과 글 쓰는 돈”이라는 항변이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당대 미국사회의 단면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주인공에게서 삶에 대한 어떠한 희망도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은 비단 그가 알코올에 찌들었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치솟는 물가와 실업자가 가중되던 당대 미국의 사회상을 감안한다면 넷의 바에 모여들어 대낮부터 술을 마시는 남자들의 모습과 돈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돈은 그들 보다 더 많이 더 자주 마실 따름이고 스스로 고백하듯이 “술을 마시면 안 되고, 멈출 수 도 없는” 사람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렇게 빌리 와일더는 할리우드의 장르 속성에 걸맞지 않는 파격적인 이야기를 소재로 화려한 도시 뉴욕의 그늘을 보여줌으로써 전후 미국사회 속에서 소멸직전에 놓인 개인의 사생활을 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와일더가 선택한 것은 인물이 공간을 지배할 때 발생하는 화학작용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서민들의 허름한 공간인 넷의 바에서 술을 마실 때의 돈이, (스스로 셈을 치룰 수 있는)공간과 어울리는 인물이라면, 고급술집인 '해리 앤 조'에서의 돈은 숙녀의 백을 훔치다가 쫓겨나는 이방인일 뿐인데, 그곳은 돈이 머물러서는 안 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헬렌을 만나는 시점에서 오페라 관람을 할 정도의 정신적으로 풍요로웠던 그가 알코올 중독자가 된 후 물질과 정신이 피폐해지면서 하층민의 삶으로 전락하고 있음을 공간적 대비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돈이 마시는 술은 곧 그의 비루한 현실에 대한 상징성을 지닌다. 가정부에게 줘야 할 10달러를 들고 주류상을 찾은 돈은 라이(Rye) 2병을 사면서 “늘 사가던 것을 주시오. 12년 산 그런 것 필요 없소!”라고 말한다. ‘라이’란 카나디안 블랜디드 위스키의 일종으로 호밀(Rye)을 4년간 숙성시켜 만드는 술인데, 20세기 들어서는 미국에서 시행된 금주령을 계기로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고 금주령이 해제된 이후 도시 하층민들이 즐겨 마시는 가장 싼 술 중 하나이다. 돈이 넷에 바에서 마시는 술 역시 라이이고 보면 그의 삶의 현재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반유태주의의 그늘
2차 세계대전 직전, 대서양을 넘나들며 미국과 유럽을 연결했던 미국의 거대한 상선회사가‘세계는 작다, 오직 미국만이 크다’라는 광고 문구를 사용했던 적이 있었다. 이는 오히려 ‘세계화’로 표현되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에 보다 더 적합한 내용일 수도 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지금까지 보여준 사회상은 특히 유럽의 정신사 속에서 항상 긍정과 부정, 그리고 애증(愛憎)을 기록해 왔으며 지금도 이는 마찬가지다. 이 영화가 만들어지던 1945년 당시의 미국은 두 번의 세계대전을 통해 세계의 중심으로 우뚝 선 국제사회에서의 위치와는 별개로, 내부적으로는 각종 사회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으니 즉, 개인의 자유의 제한과 반유태주의의 확산은 다원주의 그리고 관용을 기초로 한 미국의 민주주의 장래에 비관적인 전망을 낳고 있었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서, 해리 앤 조의 바에서 쫓겨난 돈은 기어이 타자기를 팔기위해(술을 사기 위해) 뉴욕 3번가를 헤매게 되는데, 이날이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욤 키퍼(속죄의 날 Yom Kippur)라서 전당포가 문을 연 곳이 한 곳도 없음을 알고는 넷의 바에서 술을 구걸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렇듯 먼지 날리는 뉴욕 3번가를 헤매는 돈의 발걸음을 좇다가 그가 좌절하는 장면에 이르면 관객은 끔찍한 표정과 마주하는데, 그것은 마치 지옥 앞에선 자의 표정에 다름 아니다.
1920년대 대공황을 기점으로 이전까지 미국사회를 장악했던 WASP (White-Anglo-Saxon-Protestant)는 그 세력이 점차로 약해진 반면 유태인들과 아일랜드계의 득세는 경제와 정치참여의 형태로 결실을 맺어가고 있었다. 특히 2차 대전을 기회로 연합국에 막대한 경제지원을 아끼지 않은 유태인들이 반대급부로 시오니즘의 실현(1948년 이스라엘 건국)을 얻어낸 것은 중세이후 유태인들이 상업분야에 전념하며 갖은 수모를 감수한 것에 대한 결실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잃어버린 주말> 속에 전후 미국사회에 만연했던 반유태주의에 대한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담겨있는 점은 특별할 것이 못된다. 당시 뉴욕 중심의 거의 모든 전당포는 유대인과 아일랜드 인들이 독점하고 있었으며, 유대인이 욤 키퍼에 휴무를 하는 조건으로 아일랜드 인들도 성 패트릭(St. Patrick)축제일에 문을 닫는 협정을 맺었다. 종전 직후 서민들의 생활고가 극심해졌음을 감안할 때 전당포가 성업이었을 것은 불을 보듯 빤한 일이고, 영화에 나오는 길가에 즐비한 전당포와 장의사가 이를 대변해주고 있다. (영화를 보면 12시 30분 정도에 출발한 돈이 오후 4시가 되어서야 다시 넷의 바로 돌아가는데, 뉴욕의 거의 끝까지 전당포가 곳곳에 있음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Ending_ 나락에 떨어진 자의 얼굴로 자신을 구하다
영화의 끝에 이르면 자실 대신 금주를 선언한 돈의 의미심장한 독백 “그날, 내가 가방을 쌀 때, 가방을 싸는 것이나 주말휴가에는 관심도 없었어. 내 셔츠를 가방에 넣는 것도 말이야. 내 마음은 오로지 창밖에 매달려 있었지. 18인치 정도로 밖에 매달려 있었던 거야. 그리고 그 밖에는 엄청나게 크고 넓은 세상”에 걸맞은 청명한 뉴욕의 하늘이 인상적으로 보여 지는데, 이로써 알코올 중독자 돈의 비참한 주말을 빌려 인간의 삶을 관통하는 자기투쟁의 역사를 정확하게 포착해낸 <잃어버린 주말>은 희망적 미래를 암시하며 끝을 맺는다.
이렇듯 무기력한 한 남자를 알코올 중독이 불러올 수 있는 모든 상황 속에 집어넣고는(술을 숨기고-자기 물건을 팔고-물건을 훔치고-자살을 시도하는 순차적 몰락) 어떠한 자비심도 없이 관객에게 끔찍한 경험을 안겨주는 이 영화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 각자의 몫이지만, 분명한 것은 그 결말이 명백한 해피엔딩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찌 보면 헤이스 코드(Hays Code : 1930년대에 만들어진 영화제작윤리강령)에 따른 자기검열의 결과라 할 수 있겠으나 역설적으로는 이를 비웃는 장면이 곳곳에 드러난다는 점에서, 빌리 와일더가 할리우드 제작자들의 충복이 아니었음을 반증하고 있기도 하다.
빌리 와일더에 따르면 “영화의 80%는 각본으로 결정된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각본가 출신 감독다운 언급이라 하겠고, 이 말에 동의하느냐 마느냐는 와일더의 영화를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에 따라 나뉠 테지만 적어도 코미디에 관해서는 각본이 모든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반면에 <잃어버린 주말>에서 보여준 빌리 와일더의 역량은 각본보다는 무명 배우를 완전히 캐릭터에 녹아들도록 조련한 데 있다고 하겠다. 즉 돈 버냄 역의 레이 밀랜드는 중독자의 내면성에서 마치 자기 자신을 드러낸 좌절과, 미국의 현실 변화의 방식을 고발해 보임으로써 이 영화로 아카데미와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동시에 석권하는 성취를 이뤘으며 <다이얼 M을 돌려라 (1954)>에서도 명연기로 갈채를 받기도 했다. (알코올 중독자 연기의 밀도감에 있어서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니콜라스 케이지마저 한참 모자랄 정도이다.) 달리 보면 빌리 와일더는 만년 2류 배우였던 무명의 레이 밀랜드를 구원했고 밀랜드는 <잃어버린 주말>을 구원한 셈이다. 이는 바로 전해 만들어진 <이중 배상>으로 스타덤에 오른 프레드 맥머레이의 경우와 흡사한 경우이며, 와일더의 역량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덧붙여, 영화 전반에 걸쳐 원맨쇼에 가까운 열연 퍼레이드를 펼치는 레이 밀랜드의 연기는 물론이지만, 와일더의 연출이 빛을 발하는 몇몇 장면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처음 넷의 바에서 감개무량한 마음으로 술잔을 받으면서도 “좀 더 서둘러줄 수는 없겠나?”라며 독촉할 때의 안타까운 표정을 포착한 쇼트와 술의 필요성을 설파하는 돈의 표정을 잡은 넷의 시점 쇼트, 그리고 뉴욕 3번가를 방황하는 시퀀스에서 모멸감이라고는 한줌도 남지 않은 사내의 술을 향한 집념어린 표정이 이내 좌절감으로 바뀔 때, 몸이 무너져 내리는 쇼트 등인데, 배우의 연기에 섬세함을 가미시킴으로서 극한의 진정성을 이뤄낸 이들 장면은 두고두고 잊기 힘들 듯 하다.
나가면서_ 끝장을 봐야 안심하는 남자
“그래도 못 알아듣네. 참, 사람 기막혀.
본정신 가지고는 피를 토하고 죽든지.
물에 빠져 죽든지 하지. 하루라도 살 수가 없단 말이야.” 《술 권하는 사회》
현진건의 소설이 나온 지 80여년이 흐른 지금. 한국은 또다시 ‘술 권하는 사회’가 되고 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기업구조조정으로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고 대학을 졸업하고도 갈 곳이 없는 청년실업자가 큰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일당 2만원에 생계를 걱정하는 계약직 종사자, 한 달 100만원도 넘지 않는 수입에 한숨을 토하는 택시 운전사, 카드빚에 쫓겨 유흥업소에 나온 10대들, 여기에 경제 살리기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밥그릇 싸움만 하는 정치인들까지. 밥 대신 술을 먹어도 시원치 않을 세상이다. 60년 전 영화 속 돈이 그랬듯이 세상의 모든 이들이 자신을 멸시한다는 자괴감에 사로잡혀 삶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살아갈 날이 많이 남았거나, 이미 경험한 것이 너무 많은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알코올 중독자를 극적으로 건져 올린 이야기는 영화에만 해당하지 않을 것이다. 현실에서 비껴난 소재를 통해 현실과 끊임없이 교접하려는 빌리 와일더의 시도가 의미 있는 성취를 얻어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빌리 와일더는 초기 걸작 3편 즉, <이중 배상> <잃어버린 주말> <선셋 대로>을 통해 궁지에 몰린 인물들로 하여금 도덕적 가치판단보다는 현실적 선택을 유도함으로써 개인과 개인을 둘러싼 사회구성원 모두를 문제 삼는다. 그리고 와일더의 인물들은 브레이크가 파열된 자동차처럼 끝을 볼 때 까지 달려가야 한다. 경제적 안정이 필요했던 조 길리스가 수영장 위에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때 까지(<선셋 대로>), 여인의 순수한 애정을 믿었던 네프가 그녀의 배신에 치를 떨며 총탄을 받아들일 때 까지(<이중 배상>) 그리고 알코올 중독자 돈이 지옥을 볼 때 까지(<잃어버린 주말>) 그러니 빌리 와일더야 말로 끝장을 보아야 안심하는 남자가 아닐까?
들어가며
알코올 중독자를 그린 영화를 꼽자면 마이크 피기스 감독의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나 베티 토마스 감독의 <28일 동안>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알코올 중독자의 피폐한 내면과 처참한 자기투쟁 과정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작품으로 빌리 와일더가 연출하고 레이 밀랜드가 열연한 <잃어버린 주말>에 비길 만 한 영화는 다시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또한 이후 만들어진 알코올 중독자의 삶이 나오는 모든 영화들은 이 영화에 얼마간의 빚을 지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잃어버린 주말>은 알코올 중독 영화에 관한 전범(典範)으로 자리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1945년의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인 빌리 와일더의 〈잃어버린 주말 The Lost Weekend>은 알코올 중독 문제를 부각시킴으로써 ‘의미 있는’ 주제를 좋아하는 아카데미의 입맛을 맞추기도 했지만, 이 영화에서 드러나는 전쟁 후의 우울한 분위기는 이 시대 사람들만이 공감할 수 있는 독특한 것이기도 했다. (이 작품은 1946년 열린 제 1회 칸 영화제에서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무방비 도시>와 더불어 그랑프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 영화에 대한 미국내 분위기가 우호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주류협회는 이 영화를 사장시키기 위해 파라마운트사에 500만 달러를 제시한 반면, 금주단체들은 이 영화가 오히려 음주를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를 나타내며 항의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당시로는 드문 상업적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성공한 작품이 <잃어버린 주말>이다.

Opening_ 황홀하고 완벽한 원의 세계 속으로
영화가 시작되면 뉴욕 3번가에 위치한 공동주택의 창문이 보이고 외벽에 매달린 술병과 함께 주인공 ‘돈 버냄’이 등장하는데, 그는 동생인 ‘윅’과 아버지의 농장에서 주말을 보내기 위해 짐을 꾸리는 중이다. 지독한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연인 ‘헬렌’과 동생에게 불신만 안겨주며 무위도식하는 그에게 주말 농장에서의 며칠간이 지옥 같을 게 빤한 것은 도무지 술을 마실 수 도 없고, 무능력한 패배자인 자신을 알아보는 이들의 눈초리를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동생과 헬렌이 연주회에 간 후 그는 파출부에게 줄 10달러를 손에 쥐고서 단골 술집 ‘넷의 바 (Nat's Bar)’로 향하게 된다. 이때부터 영화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술에 의존한 채 살아가는 알코올 중독자의 처절한 자기투쟁의 기록을 지독할 정도로 사실성 넘치게 묘사하며 동시대인들을 위무하고 계몽하게 된다.
<잃어버린 주말>은 빌리 와일더의 40년대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한정된 공간에서 단조로운 동선으로도 충분히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음을 증명해준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의 공간이라고는 돈의 집과 넷의 바를 오가는 반복이 이어질 뿐이며 그 밖의 장소라고 해봐야 오페라 하우스와 병원 장면이 고작일 정도로 극단적으로 짧은 동선에 의존하면서 주인공의 행동반경을 제약하게 된다. 그러니 이 궤적에 놓인 주인공에게 강박증과 금주에 따른 금단현상이 극심해질 것은 빤할 일일 터이다. 또한 이 영화는 대형 스튜디오의 지원이 없었기에 소규모 제작비로 만들어졌으며, 때문에 배우의 연기와 감독의 연출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극복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것은 1990년대 뉴욕 인디펜던트무비 붐의 효시로 볼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이중 배상>에서의 필름느와르 스타일과 거리를 두며 <선셋 대로>에서 보여준 할리우드의 자기반영적 요소도 찾아볼 수 없지만, 단출한 시공간을 활용하며 일상의 단면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와일더의 기품이 배어있다는 점에서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고 하겠다. 따라서 <잃어버린 주말>에서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배우가 공간을 지배하는 방식과 더불어 인물들의 관계망에서 읽혀지는 당대 미국사회의 병리적 현상이다.
와일더식 공간지배와 분할
영화의 주인공 돈은 코넬 대학 재학 중 학회지를 만들며 두각을 나타낸 타고난 작가이다. 자신의 천재적 능력을 과신하여 대학을 중퇴한 후 몇 편의 소설에서 성공을 맛보았지만 이내 좌절하고 글쓰기를 포기한 인물이다. 그가 애인 헬렌을 처음 만나는 곳은 ‘라 트라비아타’가 공연되는 어느 오페라극장이다. 이후 헬렌의 부모를 만나기로 한 돈은 약속을 어기고 도망치다시피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처지가 볼품없고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것 때문이다. 영화를 통틀어 유일하게 플래시백으로 구성된 두 개의 시퀀스는, 동생이 고향집으로 떠난 다음 날 넷의 바에서 진술하는 내용이며 자신이 구상중인 소설 《술병(Bottle)》의 스토리의 일부이기도 하다. 즉 자전적 소설을 술집 주인에게 들려주는 가운데 영화는 집과 넷의 바를 오가는 돈의 모습을 통해 현실과 허구 사이에서 허우적대는 알코올 중독자의 모습을 가감 없이 그려내게 된다. 그러므로 3일의 시간을 관통하는 알코올 중독자의 처절한 투쟁기가 공간의 상징성을 각기 달리할 때, 관객은 때론 윅과 헬렌의 시선으로 때론 넷과 글로리아의 시선으로 돈의 현실을 관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와일더는 두 개의 공간을 현실과 상상의 장소로 구분하고, 공간을 지배하는 인물들 역시 같은 방식으로 나누어 놓으면서 대립각을 형성시킨다. 하지만 이러한 대립의 이미지는 상반된 의미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즉 양자의 상호보완이 가능하며 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는 장치로 엮어놓고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 보여 지는 두 개의 대표적 공간은 돈의 집과 넷의 바다. 공식적으로 술을 마실 수 없는 돈의 집은 현실의 장소이며 돈만 주면 술을 마실 수 있는 넷의 바는 환상의 장소로 볼 수 있다. 집에 속한 인물인 동생 윅과 헬렌은 돈의 알코올중독에 지쳤음에도 여전히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 주는 이들이고, 넷의 바에서 만나는 주인 넷과 여급 글로리아는 그의 단점을 알면서도 포용하거나 따끔한 비판도 서슴지 않은 인물들이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가족이라 할 수 있는 윅과 헬렌을 자신을 구속하고 훈계하는 귀찮은 존재로 여기는 반면 넷과 글로리아는 술과 함께 할 수 있는 보다 친근하고 이상적인 유사가족의 이미지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또한 엄격하고 합리주의자의 면모를 지닌 동생 윅보다 투덜대면서도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주는 넷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도 이런 이유이다. 마찬가지로 상류층이며 정숙미를 갖춘 헬렌보다 비천하지만 살갑게 다가오는 여급 글로리아에게 친절한 눈빛을 보내는 행위 역시 일견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알코올중독자가 금단현상을 이기지 못해 뛰어 들어간 공간 속에 술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이지만, 영화에서 돈은 단순히 술에 대한 욕구뿐 아니라 현실에 대한 압박감에서 해방되기 위해 또는 금주에 대한 강박증을 이겨내려는 목적으로 넷의 바를 찾는 다는 점이다.

전후 미국사회의 우울증
1921년 현진건의 소설 《술 권하는 사회》의 주인공인 남편은 자신에게 술을 권하는 것은 화증도 하이칼라도 아니고 현 조선사회라고 말한다. 남편은 조선의 현실을 비판하며 그런 사회에서 자신이 할 일이란 주정꾼 노릇밖에는 할 일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내가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자 무지에 답답해하며 집을 나가버리고, 아내는 절망한 어조로 중얼 거린다.
“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
마찬가지로 엄격히 말하자면 글쓰기를 포기한 돈이 동생 윅에게 얹혀살면서부터, 동생이 주는 담배 값 55센트를 받는 상황이 불러온 강박증이 그에게 끊임없이 술 마시도록 권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믿음이 유일한 방법”이라 믿는 헬렌의 극진한 애정과 “6년 동안 할 만큼 다 했다”고 푸념하는 동생 윅에 대한 과도한 강박관념이 빚어낸 비극적 일상은 죽기 전에는 멈출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어 나를 술 마시게 한다” “두 명의 돈이 있는데, 술 마시는 돈과 글 쓰는 돈”이라는 항변이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당대 미국사회의 단면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주인공에게서 삶에 대한 어떠한 희망도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은 비단 그가 알코올에 찌들었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치솟는 물가와 실업자가 가중되던 당대 미국의 사회상을 감안한다면 넷의 바에 모여들어 대낮부터 술을 마시는 남자들의 모습과 돈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돈은 그들 보다 더 많이 더 자주 마실 따름이고 스스로 고백하듯이 “술을 마시면 안 되고, 멈출 수 도 없는” 사람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렇게 빌리 와일더는 할리우드의 장르 속성에 걸맞지 않는 파격적인 이야기를 소재로 화려한 도시 뉴욕의 그늘을 보여줌으로써 전후 미국사회 속에서 소멸직전에 놓인 개인의 사생활을 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와일더가 선택한 것은 인물이 공간을 지배할 때 발생하는 화학작용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서민들의 허름한 공간인 넷의 바에서 술을 마실 때의 돈이, (스스로 셈을 치룰 수 있는)공간과 어울리는 인물이라면, 고급술집인 '해리 앤 조'에서의 돈은 숙녀의 백을 훔치다가 쫓겨나는 이방인일 뿐인데, 그곳은 돈이 머물러서는 안 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헬렌을 만나는 시점에서 오페라 관람을 할 정도의 정신적으로 풍요로웠던 그가 알코올 중독자가 된 후 물질과 정신이 피폐해지면서 하층민의 삶으로 전락하고 있음을 공간적 대비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돈이 마시는 술은 곧 그의 비루한 현실에 대한 상징성을 지닌다. 가정부에게 줘야 할 10달러를 들고 주류상을 찾은 돈은 라이(Rye) 2병을 사면서 “늘 사가던 것을 주시오. 12년 산 그런 것 필요 없소!”라고 말한다. ‘라이’란 카나디안 블랜디드 위스키의 일종으로 호밀(Rye)을 4년간 숙성시켜 만드는 술인데, 20세기 들어서는 미국에서 시행된 금주령을 계기로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고 금주령이 해제된 이후 도시 하층민들이 즐겨 마시는 가장 싼 술 중 하나이다. 돈이 넷에 바에서 마시는 술 역시 라이이고 보면 그의 삶의 현재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반유태주의의 그늘
2차 세계대전 직전, 대서양을 넘나들며 미국과 유럽을 연결했던 미국의 거대한 상선회사가‘세계는 작다, 오직 미국만이 크다’라는 광고 문구를 사용했던 적이 있었다. 이는 오히려 ‘세계화’로 표현되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에 보다 더 적합한 내용일 수도 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지금까지 보여준 사회상은 특히 유럽의 정신사 속에서 항상 긍정과 부정, 그리고 애증(愛憎)을 기록해 왔으며 지금도 이는 마찬가지다. 이 영화가 만들어지던 1945년 당시의 미국은 두 번의 세계대전을 통해 세계의 중심으로 우뚝 선 국제사회에서의 위치와는 별개로, 내부적으로는 각종 사회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으니 즉, 개인의 자유의 제한과 반유태주의의 확산은 다원주의 그리고 관용을 기초로 한 미국의 민주주의 장래에 비관적인 전망을 낳고 있었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서, 해리 앤 조의 바에서 쫓겨난 돈은 기어이 타자기를 팔기위해(술을 사기 위해) 뉴욕 3번가를 헤매게 되는데, 이날이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욤 키퍼(속죄의 날 Yom Kippur)라서 전당포가 문을 연 곳이 한 곳도 없음을 알고는 넷의 바에서 술을 구걸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렇듯 먼지 날리는 뉴욕 3번가를 헤매는 돈의 발걸음을 좇다가 그가 좌절하는 장면에 이르면 관객은 끔찍한 표정과 마주하는데, 그것은 마치 지옥 앞에선 자의 표정에 다름 아니다.
1920년대 대공황을 기점으로 이전까지 미국사회를 장악했던 WASP (White-Anglo-Saxon-Protestant)는 그 세력이 점차로 약해진 반면 유태인들과 아일랜드계의 득세는 경제와 정치참여의 형태로 결실을 맺어가고 있었다. 특히 2차 대전을 기회로 연합국에 막대한 경제지원을 아끼지 않은 유태인들이 반대급부로 시오니즘의 실현(1948년 이스라엘 건국)을 얻어낸 것은 중세이후 유태인들이 상업분야에 전념하며 갖은 수모를 감수한 것에 대한 결실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잃어버린 주말> 속에 전후 미국사회에 만연했던 반유태주의에 대한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담겨있는 점은 특별할 것이 못된다. 당시 뉴욕 중심의 거의 모든 전당포는 유대인과 아일랜드 인들이 독점하고 있었으며, 유대인이 욤 키퍼에 휴무를 하는 조건으로 아일랜드 인들도 성 패트릭(St. Patrick)축제일에 문을 닫는 협정을 맺었다. 종전 직후 서민들의 생활고가 극심해졌음을 감안할 때 전당포가 성업이었을 것은 불을 보듯 빤한 일이고, 영화에 나오는 길가에 즐비한 전당포와 장의사가 이를 대변해주고 있다. (영화를 보면 12시 30분 정도에 출발한 돈이 오후 4시가 되어서야 다시 넷의 바로 돌아가는데, 뉴욕의 거의 끝까지 전당포가 곳곳에 있음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Ending_ 나락에 떨어진 자의 얼굴로 자신을 구하다
영화의 끝에 이르면 자실 대신 금주를 선언한 돈의 의미심장한 독백 “그날, 내가 가방을 쌀 때, 가방을 싸는 것이나 주말휴가에는 관심도 없었어. 내 셔츠를 가방에 넣는 것도 말이야. 내 마음은 오로지 창밖에 매달려 있었지. 18인치 정도로 밖에 매달려 있었던 거야. 그리고 그 밖에는 엄청나게 크고 넓은 세상”에 걸맞은 청명한 뉴욕의 하늘이 인상적으로 보여 지는데, 이로써 알코올 중독자 돈의 비참한 주말을 빌려 인간의 삶을 관통하는 자기투쟁의 역사를 정확하게 포착해낸 <잃어버린 주말>은 희망적 미래를 암시하며 끝을 맺는다.
이렇듯 무기력한 한 남자를 알코올 중독이 불러올 수 있는 모든 상황 속에 집어넣고는(술을 숨기고-자기 물건을 팔고-물건을 훔치고-자살을 시도하는 순차적 몰락) 어떠한 자비심도 없이 관객에게 끔찍한 경험을 안겨주는 이 영화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 각자의 몫이지만, 분명한 것은 그 결말이 명백한 해피엔딩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찌 보면 헤이스 코드(Hays Code : 1930년대에 만들어진 영화제작윤리강령)에 따른 자기검열의 결과라 할 수 있겠으나 역설적으로는 이를 비웃는 장면이 곳곳에 드러난다는 점에서, 빌리 와일더가 할리우드 제작자들의 충복이 아니었음을 반증하고 있기도 하다.
빌리 와일더에 따르면 “영화의 80%는 각본으로 결정된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각본가 출신 감독다운 언급이라 하겠고, 이 말에 동의하느냐 마느냐는 와일더의 영화를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에 따라 나뉠 테지만 적어도 코미디에 관해서는 각본이 모든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반면에 <잃어버린 주말>에서 보여준 빌리 와일더의 역량은 각본보다는 무명 배우를 완전히 캐릭터에 녹아들도록 조련한 데 있다고 하겠다. 즉 돈 버냄 역의 레이 밀랜드는 중독자의 내면성에서 마치 자기 자신을 드러낸 좌절과, 미국의 현실 변화의 방식을 고발해 보임으로써 이 영화로 아카데미와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동시에 석권하는 성취를 이뤘으며 <다이얼 M을 돌려라 (1954)>에서도 명연기로 갈채를 받기도 했다. (알코올 중독자 연기의 밀도감에 있어서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니콜라스 케이지마저 한참 모자랄 정도이다.) 달리 보면 빌리 와일더는 만년 2류 배우였던 무명의 레이 밀랜드를 구원했고 밀랜드는 <잃어버린 주말>을 구원한 셈이다. 이는 바로 전해 만들어진 <이중 배상>으로 스타덤에 오른 프레드 맥머레이의 경우와 흡사한 경우이며, 와일더의 역량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덧붙여, 영화 전반에 걸쳐 원맨쇼에 가까운 열연 퍼레이드를 펼치는 레이 밀랜드의 연기는 물론이지만, 와일더의 연출이 빛을 발하는 몇몇 장면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처음 넷의 바에서 감개무량한 마음으로 술잔을 받으면서도 “좀 더 서둘러줄 수는 없겠나?”라며 독촉할 때의 안타까운 표정을 포착한 쇼트와 술의 필요성을 설파하는 돈의 표정을 잡은 넷의 시점 쇼트, 그리고 뉴욕 3번가를 방황하는 시퀀스에서 모멸감이라고는 한줌도 남지 않은 사내의 술을 향한 집념어린 표정이 이내 좌절감으로 바뀔 때, 몸이 무너져 내리는 쇼트 등인데, 배우의 연기에 섬세함을 가미시킴으로서 극한의 진정성을 이뤄낸 이들 장면은 두고두고 잊기 힘들 듯 하다.
나가면서_ 끝장을 봐야 안심하는 남자
“그래도 못 알아듣네. 참, 사람 기막혀.
본정신 가지고는 피를 토하고 죽든지.
물에 빠져 죽든지 하지. 하루라도 살 수가 없단 말이야.” 《술 권하는 사회》
현진건의 소설이 나온 지 80여년이 흐른 지금. 한국은 또다시 ‘술 권하는 사회’가 되고 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기업구조조정으로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고 대학을 졸업하고도 갈 곳이 없는 청년실업자가 큰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일당 2만원에 생계를 걱정하는 계약직 종사자, 한 달 100만원도 넘지 않는 수입에 한숨을 토하는 택시 운전사, 카드빚에 쫓겨 유흥업소에 나온 10대들, 여기에 경제 살리기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밥그릇 싸움만 하는 정치인들까지. 밥 대신 술을 먹어도 시원치 않을 세상이다. 60년 전 영화 속 돈이 그랬듯이 세상의 모든 이들이 자신을 멸시한다는 자괴감에 사로잡혀 삶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살아갈 날이 많이 남았거나, 이미 경험한 것이 너무 많은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알코올 중독자를 극적으로 건져 올린 이야기는 영화에만 해당하지 않을 것이다. 현실에서 비껴난 소재를 통해 현실과 끊임없이 교접하려는 빌리 와일더의 시도가 의미 있는 성취를 얻어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빌리 와일더는 초기 걸작 3편 즉, <이중 배상> <잃어버린 주말> <선셋 대로>을 통해 궁지에 몰린 인물들로 하여금 도덕적 가치판단보다는 현실적 선택을 유도함으로써 개인과 개인을 둘러싼 사회구성원 모두를 문제 삼는다. 그리고 와일더의 인물들은 브레이크가 파열된 자동차처럼 끝을 볼 때 까지 달려가야 한다. 경제적 안정이 필요했던 조 길리스가 수영장 위에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때 까지(<선셋 대로>), 여인의 순수한 애정을 믿었던 네프가 그녀의 배신에 치를 떨며 총탄을 받아들일 때 까지(<이중 배상>) 그리고 알코올 중독자 돈이 지옥을 볼 때 까지(<잃어버린 주말>) 그러니 빌리 와일더야 말로 끝장을 보아야 안심하는 남자가 아닐까?
(추신) 빌리 와일더의 초기 세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다음은 앞서 언급한대로 이전보다 교묘하게 웃음으로 포장하면서도 신랄한 비판을 담아 탁월한 영상미를 보여준 <제 17 포로수용소>이다. 당초 빌리 와일더 시리즈는 <제 17 포로수용소>에서 끝마치려 했으나, 이왕 시작한 것 나도 끝을 봐야겠다는 마음으로 라인업을 늘릴 생각이다. 아마도 코미디시대까지 접근할듯한데, <뜨거운 것이 좋아> <7년만의 외출>을 마릴린 먼로 시리즈로 묶고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와 <키스 미 스투피드>에서 마무리 할 생각이지만, <빅 카니발>과 <정부>는 여건이 허락된다면 꼭 다뤄보고 싶은 작품이다. |
- 2006.12.18 백건영(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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