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09일
빌리 와일더와 할리우드 (4) [제 17 포로수용소]
2차 대전이 벌어지자 미국의 감독들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전쟁에 참여하여 기록영화를 찍게 된다. 비록 미 국방성 자체가 직접적인 제작자나 선전 영화의 개발자가 되지는 못했으나 영화제작이 군 최고사령부의 관심에 힘입어 진행되었다. 프랭크 카프라, 존 휴스턴, 존 포드, 윌리엄 와일러 같은 감독들이 (독일이 그러했던 것처럼) 군대를 따라다니며 미군을 위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이를테면 조지 스티븐스는 다하우(Dachau Concentration Camp)에서 <베를린으로 돌격>을 찍어 실제 영상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새뮤얼 풀러가 <빅 레드 원 (1980)>에서 과감하게 그것을 삽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전쟁의 이면을 탐색한 영화는 거의 없었다. 그나마 윌리엄 와일러의 <우리 생애 최고의 해 (1946)>가 재향군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사회적 이슈가 될 만한 드라마를 만드는 것도 이 작품으로 끝이었다. 왜냐하면 매카시를 중심으로 할리우드 내 적색분자 색출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국식 전쟁영웅이 나오지도 않고, 완벽한 탈주극도 아닌 한 편의 소동극처럼 읽혀질 법한 <제 17 포로수용소 (1953)>가 이 시점에서 만들어진 것은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달리 말하면 빌리 와일더의 유머와 신랄한 풍자의 수사가 경지에 올랐음을 반증한다고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빌리 와일더의 영화세계를 연대기별로 구분하자면, <비장의 술수 (1951)>의 상업적 실패로 인해 자본주의 미국사회에 대한 음울한 수법과 저변에 깔린 냉소주의가 막을 내리기까지의 느와르 및 사회성 짙은 드라마 시대와, 더 은근하면서도 교묘하게 표면의 웃음을 통해 자신의 냉소를 감추는 방법을 택하게 되는 코미디 드라마의 전성시대로 나눌 수 있다. <사브리나 (1954)> <7년 만의 외출 (1955)> <하오의 연정 (1957)> <뜨거운 것이 좋아 (1959)> <아파트 열쇠를 빌려 드립니다 (1960)> <키스 미 스투피드 (1964)>에서 볼 수 있듯이 도회적 삶 속에서 웃음을 만들어낸 와일더의 능력은 대부분 블랙코미디에서 그 빛을 발하였다. 장르라는 익숙한 형식 속에 주제의 낯설음을 버무려내던 그의 영화는 당대 사회의 위선을 비틀고 까발리는 동안 웃음과 긴장감을 동시에 획득했던 것이다. <제 17 포로수용소 (1953>)로 시작된 빌리 와일더의 코미디 드라마는 허위의식과 익숙지 않은 상황들을 코앞까지 바짝 들이대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도록 만들고 있다.
<제 17 포로수용소_ STALAG 17.>
“전쟁을 다룬 영화는 많았지만 전쟁포로에 관한 영화는 전무했다”는 오프닝 타이틀에서 볼 수 있듯, <제 17 포로수용소>는 전쟁포로에 관한 최초의 영화이다. 여기서 빌리 와일더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기적인 인물 세프턴(윌리엄 홀든)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니컬한 시선을 드러내면서도 브로드웨이에서 대박을 쳤던 원작의 배우들을 끌어들여 코믹한 휴먼드라마를 빚어내게 된다. 이러한 그의 솜씨는 분명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와일더 영화의 정수라 할 만 한 것이고, <제17 포로수용소>는 그 정수의 본격적인 시발점이 되어 주었던 영화임에 틀림없다. 이 작품은 위대한 장인의 기량이 만개한 순간을 목격할 수 있다는데서 또 다른 의미를 찾을 수도 있는데 일반적인 포로수용소 배경의 영화와 유사한 결말로 끝을 맺으면서도, 다른 영화에서는 맛볼 수 없는 비수 같이 날카로운 해피엔딩을 끌어내는 수법의 비범함이 그것이다.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에서 빌리 와일더가 선택한 것은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거나, 나치를 단죄하거나 연합군의 사기를 북돋우며 승리를 기원하는 계몽적 스펙터클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전쟁의 중심에서 비켜난 곳에 존재하는 640명의 포로들의 환경과 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기상천외한 일들을 유머러스한 대사와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유쾌하게 그려내는데 주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빌리 와일더의 시선은 단순한 사건의 나열과 탈주드라마에 머물지 않고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즉, 철저하게 개인의 안위를 지향했던 세프턴을 자본주의의 알레고리로 사용하면서 그의 이기적 행위가 궁극적으로 이타적이 되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전쟁과 포로수용소라는 시공간적 무게감을 극복하기 위해 곳곳에 배치된 풍자극적 장치를 통해 하나씩 상정되기 이른다. 훗날 트뤼포는 이 영화를 “와일더의 최고 걸작 영화”라고 치켜 올렸으며, 영화 별점평가를 만든 레너드 말틴은 “이 영화가 전쟁포로를 그린 모든 영화의 Granddaddy”라며 별 넷 만점을 준 것으로 유명하다. 이제부터 빌리 와일더의 한층 노련해진 작법과 유머와 풍자가 가미된 빼어난 전쟁영화의 걸작 <제 17 포로수용소>를 본격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알레고리 : 미국식 자본주의
영화는 1944년의 크리스마스를 열흘 앞둔 어느 날, 다뉴브 강 근처의 제 17 포로수용소에서 벌어진 탈주사건으로 시작되며, 이때부터의 모든 이야기는 2년 반을 그곳에서 보냈던 ‘쿠키’라는 미공군중사의 회고담형식으로 진행된다. ‘일 년 중 가장 탈출하기 좋은 날’ 밤 막사를 빠져나갔던 맨프레드와 존슨이 독일초병에게 발각되어 사살당한 후 4호 막사에는 어두운 분위기가 감지된다. 그들은 내부에 스파이가 있다고 여기지만 증거가 없어 전전긍긍하던 중 가장 야비하고 눈엣가시인 세프턴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게 된다.
1차 세계대전이 선발제국주의와 후발제국주의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었던데 반해 2차 대전은 자유 민주진영과 파시즘 간에 벌어진 전쟁이었다. 두 차례의 대전을 통해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우월적 지위를 획득했고 자유진영의 수호자를 자임하게 되는데, 원조와 복구라는 명분을 등에 업은 미국적 삶과 미국식 자본주의가 유럽사회에 무혈 입성하는 것도 이 시기이다. 그러므로 세프턴이라는 이기적인간의 상업 활동을 빌려 자본주의에 대한 허와 실을 신랄하게 조롱하는 영화적 시선 즉, 4호 막사를 자본주의 사회의 알레고리로 사용하는데서 비롯된 와일더의 비판은 곧 전승국이자 자유진영의 대표주자로 자리한 미국식 자본주의를 겨냥한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쿠키의 회상대로 ‘잊을 수 없는 인물’로 손색없는 세프턴은, 획득과 교환을 통해 이기적 인간의 전형을 보이는 인물이지만 수용소 내 최고의 수완가이며 장사꾼이기도 하다. 그는 수시로 내기를 걸어 담배를 획득하고, 사설 경마를 개설해 마권을 팔기도 하며 증류기로 질 낮은 술을 만들어 사설 바를 운영하거나 망원경을 설치해 러시아수용소의 여자들을 관람하는 대가로 담배를 받는 등 갖은 방법으로 개인물품을 끌어 모은다. 이렇게 취득한 담배와 구호품을 독일병사에게 주고 필요한 것으로 교환하는 방식을 통해 사업에 필요한 물건을 손에 넣는 그의 모습에서 철저한 자본주의자의 전형을 보게 되는데, “적십자 구호품을 가로챌 궁리만 한다”는 막사반장의 비난도 무리가 아닐 정도다. 하지만 미국식 자본주의에 대한 와일더의 시니컬함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세프턴의 행위가 동료들의 미움을 산 후 막사 내 스파이로 지목될 때까지 밀어붙인다. 이를테면 맨드레드와 존슨의 탈출 실패, 탈출구의 위치, 라디오 은닉장소 발각 등, 막사 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행위를 독일 측이 알고 있는 것은 세프턴이 특혜의 대가로 독일 측 스파이 노릇을 해왔을 것이라는 추측을 부르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막사 내에서 자본주의에 물든 것은 비단 세프턴 뿐만이 아니었다. 영화의 화자이며 그의 수하인 쿠키는 물론이고, 세프턴을 멸시하면서도 그가 만들어놓은 자본주의적 발상에 열광하고 일희일비하는 나머지 포로들 역시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인간라는 점이다. 따라서 세프턴의 주력사업이 양조(술)와 망원경(여자) 경마(노름)라는 설정은 자본주의와 사유재산의 병폐를 바라보는 빌리 와일더의 명백한 시각을 상징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샤피로에게 배달된 5통의 편지 모두가 (당사자는 전쟁에 참가해 포로가 되어있는데) 자동차회사에서 보낸 할부금 독촉장과 압류통지서라는 점은 아연실색할 지경이지만, 이에 머물지 않고 예기치 않은 반전을 통해 막판까지 미국적 가치관을 뒤집는다는 점에서 와일더의 탁월한 능력은 증명된다. 즉 감독의 의해 내러티브상 우월적 지위를 획득하고는 내기마다 이기며 갖가지 물건을 소유함으로써 다른 이들의 멸시와 의심의 대상이었던 세프턴이, 바로 그 비열한 인물이! 스파이를 찾아내고 던바 대위도 탈출시킨다는 점이 그것이다. 모두가 실패한 일에 유일하게 성공하는 그가 동료들에게 “길모퉁이에서 보더라도 서로 아는 척 하지 말자”는 말을 던짐으로써 막사를 빠져나가는 마지막까지도 냉소주의자의 면모를 유지하는 것은 얼마나 멋진가. 결국 영화 속 세프턴과 동료들 사이에는 어떠한 동족애나 동료애가 스며있지 않으며 때문에 막판에 이르러도 그들을 서로 화해하지 않는다.
아이러니 : 이기적이거나 혹은 이타적이거나
하지만 한 가지 되짚어야 할 것은, 그의 야비한 분투 즉, 지독한 이기주의자의 모습으로 냉소적 언사를 퍼붓는 세프턴의 행위가 수용소 내 필요악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모든 포로들이 그를 비난하면서도 한 편으로 부러워하는 것은 자본가를 바라보는 노동계급의 시선과 궤를 같이 한다. 만약 그의 상업적, 이기적 행위가 없었더라면 술을 마시거나, 러시아 여자들을 망원경으로 훔쳐보거나, 경마를 하며 주말저녁 한 때 나마 즐거울 수 있었을까? 때문에 초조와 불안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포로수용소에서의 세프턴의 존재는 동료의 구호품을 앗아가는 수탈자로 인식되기에 앞서, 지루한 생활에 활력소를 불러오는 유희와 오락의 제공자로서 더 큰 위력을 발휘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의 이기적 행위를 무조건 멸시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앞서 언급한대로 막사 내 스파이를 찾아내는 것도 던바 대위와 탈출에 성공하는 것도 모두 세프턴이라는 점은 그의 이전 행위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결말이지만, 이로써 빌리 와일더의 의도는 명백해진다. 즉, 이기주의가 이뤄낸 이타적 행위의 웃지 못 할 아이러니에 대한 거대한 은유. 거칠게 말하면 (과정과 명분이 어떠했던 간에) 전승국, 특히 미국이 모든 것을 차지하는 The Winner Takes It All에 대한 얼음장처럼 차가운 끄덕임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는 후반부에서 보여 진 세프턴의 행위가 숭고한 의미의 자유를 얻고자 한 것이 아니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논증 가능한데, 이를테면 그가 스파이를 색출한 것은 자신의 누명을 벗으려는 목적일 뿐, 미국을 위한 군인의 사명감에서 발로된 행위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스파이를 찾아내거나, 혹은 동료들에게 맞아 죽거나 일터이다. 그러므로 그의 스파이 색출이 여전히 이기적 행동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시작이 삶에 대한 애착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며, 그가 던바 대위의 탈출을 돕는데 자원하는 것 역시 자신을 스파이로 몰았던 이들로부터 자유롭고 싶었을 것이라는 점은 감안한다면 이 또한 이기적사고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영광과 자유세계의 수호 따위에는 관심도 없이 오로지 “있는 동안 편하게 지낼 수 만 있다면 독일군과 어떤 거래도 불사하겠다”는 세프턴의 이기주의와 자유로운 사고가 장교를 구하고 스스로를 구하며 수용소내의 불신과 불안요소를 제거했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영화의 마지막은 세프턴과 던바 대위의 탈출 이후 행적이 아닌,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하나 둘씩 침상으로 오르던 포로들 모습과 정적을 뚫고 들려오는 휘파람 소리로 끝을 맺는다. (던바와 세프턴의 탈출이 전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관심조차 없어 보이는 와일더의 세계를 도대체 어떻게 해독해야 할까.)
빌리 와일더식 풍자의 수사학
<제 17 포로수용소>에서의 빌리 와일더식 농담과 코미디에 동조할 수밖에 없는 것은, 영화 속 에피소드들이 처절한 현실에 대한 역설적 풍자극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거장이라 이름 붙은 이들의 영화가 흔히 그러하듯 와일더의 영화에는 일반적인 장르 영화들이 넘볼 수 없는 특별함이 있다. 여기서 특별함이란 독일군 대 미군 포로들 간의 대립이 아닌, 포로와 포로들 사이의 대립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이다. 즉 영화는 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향한 눈물겨운 탈옥기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벌여야만 하는 야비한 분투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전쟁영화에서의 미군은 영웅적 행위를 통해 자유의 수호자로 그려진 반면 독일군은 히틀러의 광기에 사로잡힌 무자비하고 악랄한 파시즘의 추종자 형상을 띄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제 17 포로수용소>에서는 이러한 등식이 모조리 뒤집히는데, 암울할 수밖에 없는 포로수용소의 일상을 소동극으로 둔갑시키고 희화화 하는 역설적 시퀀스들이 그러하다. 예를 들어, 4호 막사 담당 슐츠가 아침마다 포로들을 깨우는 장면을 보면 이들 사이에는 오가는 농담과 가시 돋친 조롱이 위험수위를 넘나듦에도 불구하고 유쾌하기만 하다. 잡힌 자와 사로잡은 자의 구분이 모호하고 미군과 독일군의 위치가 불분명할 정도로 혼란 속에서 수용소의 하루가 시작되는데, 이들의 일상자체가 한편의 코미디에 가까울 정도다. 이는 수용소의 현실과는 전혀 무관한 유머러스한 설정을 통해 전쟁에 동원된 자들의 혼란스런 가치관을 드러내려는 의도에 다름 아닐 것이다. 수용소 사령관은 포로들의 탈출로 인해 자신의 업적이 훼손될까봐 전전긍긍할 따름이고, 막사 담당 슐츠는 사령관과 스파이 사이의 연락을 맡고 있지만, 한 때 미국에서 레슬링선수로 활동했던 전력을 자랑하며 포로들을 인간적으로 대해주는 인물로 그려진다. 또한 포로에게 총까지 맡긴 채 배구공을 던지며 즐거워하는 독일병사의 모습은 차라리 안쓰러워 보일 정도다. 감독의 이런 희극적 재능은 영화의 몇몇 캐릭터 때문에 더욱더 빛이 나는데, 영화에서 애니멀과 샤피로를 연기하는 콤비(브로드웨이 뮤지컬 공연 당시에도 같은 역을 맡았던) 로버트 스트라우스와 하비 렘베크의 경우 그들이 벌이는 러시아 여자 포로 목욕탕 전진 사건이나, 샤피로가 베티 그레이블을 잊지 못하는 애니멀을 위해 가발을 쓰고 흉내를 내면서 위로하는 장면들은 (광대라는 별칭에 맞게)영화 전반에 걸쳐 흥겨움을 선사하는 견인차가 되고 있다. (그들의 모습은 와일더의 1959년작 <뜨거운 것이 좋아>에서의 잭 레먼과 토니 커티스를 떠올리게 만든다) 또한 독일군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나의 투쟁》이라는 지침서를 학습한다는 이유로 모든 포로들이 히틀러 흉내를 내며 콧수염을 달고 딱딱한 독일군 영어 악센트를 선보이면서 막사에 들어오는 슐츠를 맞이하는 모습은, 즐겁기도 하지만 동시에 서글픔을 머금게 만드는 장면이기도 하다. 덧붙여 전쟁 전 배우였다는 인물을 등장시켜 개리 그랜트나 클라크 케이블의 멋진 대사까지 곁들여가며 지적인 풍자를 만들어내더니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When Johnny Come Marchin' Home’라는 익숙한 멜로디의 군가를 부르고 춤까지 추는 장면은 빌리 와일더가 장르의 명장임을 확인시켜주는 대목이다.

빌리 와일더는 동시대에 활동했던 그 누구보다 훌륭한 영화들을 많이 만든 장인이었고, <제17 포로수용소>는 그의 화려한 필모그래피에 주렁주렁 달려있는 풍성하고 달콤한 열매 중 하나이다. 50년이 넘은 지금보아도 낡거나 진부하지 않은 이야기와 필요한 것만 취사선택하는 간결함과 멋 부리지 않고 기본에 충실한 카메라 워크까지. 그러니 보다 밝은 채색으로써 빌리 와일더의 세계의 새로운 막을 활짝 열어 제친 이 작품을 어찌 마다할 수 있을까! 해묵은 이야기고 거장의 작품을 볼 때 마다 느끼는 바지만, 현재 한국영화 중에서 50년 뒤에도 살아남아 관객을 흥분시킬 작품이 몇이나 될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던지는 고언(苦言), ‘정말로... 하고 싶은 것에 집착하지 말고 할 줄 아는 것을 해야 한다’는 것. 빌리 와일더가 그것을 온몸으로 증명해주지 않았던가.
빌리 와일더의 영화세계를 연대기별로 구분하자면, <비장의 술수 (1951)>의 상업적 실패로 인해 자본주의 미국사회에 대한 음울한 수법과 저변에 깔린 냉소주의가 막을 내리기까지의 느와르 및 사회성 짙은 드라마 시대와, 더 은근하면서도 교묘하게 표면의 웃음을 통해 자신의 냉소를 감추는 방법을 택하게 되는 코미디 드라마의 전성시대로 나눌 수 있다. <사브리나 (1954)> <7년 만의 외출 (1955)> <하오의 연정 (1957)> <뜨거운 것이 좋아 (1959)> <아파트 열쇠를 빌려 드립니다 (1960)> <키스 미 스투피드 (1964)>에서 볼 수 있듯이 도회적 삶 속에서 웃음을 만들어낸 와일더의 능력은 대부분 블랙코미디에서 그 빛을 발하였다. 장르라는 익숙한 형식 속에 주제의 낯설음을 버무려내던 그의 영화는 당대 사회의 위선을 비틀고 까발리는 동안 웃음과 긴장감을 동시에 획득했던 것이다. <제 17 포로수용소 (1953>)로 시작된 빌리 와일더의 코미디 드라마는 허위의식과 익숙지 않은 상황들을 코앞까지 바짝 들이대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도록 만들고 있다.
<제 17 포로수용소_ STALAG 17.>
“전쟁을 다룬 영화는 많았지만 전쟁포로에 관한 영화는 전무했다”는 오프닝 타이틀에서 볼 수 있듯, <제 17 포로수용소>는 전쟁포로에 관한 최초의 영화이다. 여기서 빌리 와일더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기적인 인물 세프턴(윌리엄 홀든)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니컬한 시선을 드러내면서도 브로드웨이에서 대박을 쳤던 원작의 배우들을 끌어들여 코믹한 휴먼드라마를 빚어내게 된다. 이러한 그의 솜씨는 분명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와일더 영화의 정수라 할 만 한 것이고, <제17 포로수용소>는 그 정수의 본격적인 시발점이 되어 주었던 영화임에 틀림없다. 이 작품은 위대한 장인의 기량이 만개한 순간을 목격할 수 있다는데서 또 다른 의미를 찾을 수도 있는데 일반적인 포로수용소 배경의 영화와 유사한 결말로 끝을 맺으면서도, 다른 영화에서는 맛볼 수 없는 비수 같이 날카로운 해피엔딩을 끌어내는 수법의 비범함이 그것이다.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에서 빌리 와일더가 선택한 것은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거나, 나치를 단죄하거나 연합군의 사기를 북돋우며 승리를 기원하는 계몽적 스펙터클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전쟁의 중심에서 비켜난 곳에 존재하는 640명의 포로들의 환경과 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기상천외한 일들을 유머러스한 대사와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유쾌하게 그려내는데 주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빌리 와일더의 시선은 단순한 사건의 나열과 탈주드라마에 머물지 않고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즉, 철저하게 개인의 안위를 지향했던 세프턴을 자본주의의 알레고리로 사용하면서 그의 이기적 행위가 궁극적으로 이타적이 되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전쟁과 포로수용소라는 시공간적 무게감을 극복하기 위해 곳곳에 배치된 풍자극적 장치를 통해 하나씩 상정되기 이른다. 훗날 트뤼포는 이 영화를 “와일더의 최고 걸작 영화”라고 치켜 올렸으며, 영화 별점평가를 만든 레너드 말틴은 “이 영화가 전쟁포로를 그린 모든 영화의 Granddaddy”라며 별 넷 만점을 준 것으로 유명하다. 이제부터 빌리 와일더의 한층 노련해진 작법과 유머와 풍자가 가미된 빼어난 전쟁영화의 걸작 <제 17 포로수용소>를 본격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알레고리 : 미국식 자본주의
영화는 1944년의 크리스마스를 열흘 앞둔 어느 날, 다뉴브 강 근처의 제 17 포로수용소에서 벌어진 탈주사건으로 시작되며, 이때부터의 모든 이야기는 2년 반을 그곳에서 보냈던 ‘쿠키’라는 미공군중사의 회고담형식으로 진행된다. ‘일 년 중 가장 탈출하기 좋은 날’ 밤 막사를 빠져나갔던 맨프레드와 존슨이 독일초병에게 발각되어 사살당한 후 4호 막사에는 어두운 분위기가 감지된다. 그들은 내부에 스파이가 있다고 여기지만 증거가 없어 전전긍긍하던 중 가장 야비하고 눈엣가시인 세프턴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게 된다.
1차 세계대전이 선발제국주의와 후발제국주의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었던데 반해 2차 대전은 자유 민주진영과 파시즘 간에 벌어진 전쟁이었다. 두 차례의 대전을 통해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우월적 지위를 획득했고 자유진영의 수호자를 자임하게 되는데, 원조와 복구라는 명분을 등에 업은 미국적 삶과 미국식 자본주의가 유럽사회에 무혈 입성하는 것도 이 시기이다. 그러므로 세프턴이라는 이기적인간의 상업 활동을 빌려 자본주의에 대한 허와 실을 신랄하게 조롱하는 영화적 시선 즉, 4호 막사를 자본주의 사회의 알레고리로 사용하는데서 비롯된 와일더의 비판은 곧 전승국이자 자유진영의 대표주자로 자리한 미국식 자본주의를 겨냥한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쿠키의 회상대로 ‘잊을 수 없는 인물’로 손색없는 세프턴은, 획득과 교환을 통해 이기적 인간의 전형을 보이는 인물이지만 수용소 내 최고의 수완가이며 장사꾼이기도 하다. 그는 수시로 내기를 걸어 담배를 획득하고, 사설 경마를 개설해 마권을 팔기도 하며 증류기로 질 낮은 술을 만들어 사설 바를 운영하거나 망원경을 설치해 러시아수용소의 여자들을 관람하는 대가로 담배를 받는 등 갖은 방법으로 개인물품을 끌어 모은다. 이렇게 취득한 담배와 구호품을 독일병사에게 주고 필요한 것으로 교환하는 방식을 통해 사업에 필요한 물건을 손에 넣는 그의 모습에서 철저한 자본주의자의 전형을 보게 되는데, “적십자 구호품을 가로챌 궁리만 한다”는 막사반장의 비난도 무리가 아닐 정도다. 하지만 미국식 자본주의에 대한 와일더의 시니컬함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세프턴의 행위가 동료들의 미움을 산 후 막사 내 스파이로 지목될 때까지 밀어붙인다. 이를테면 맨드레드와 존슨의 탈출 실패, 탈출구의 위치, 라디오 은닉장소 발각 등, 막사 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행위를 독일 측이 알고 있는 것은 세프턴이 특혜의 대가로 독일 측 스파이 노릇을 해왔을 것이라는 추측을 부르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막사 내에서 자본주의에 물든 것은 비단 세프턴 뿐만이 아니었다. 영화의 화자이며 그의 수하인 쿠키는 물론이고, 세프턴을 멸시하면서도 그가 만들어놓은 자본주의적 발상에 열광하고 일희일비하는 나머지 포로들 역시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인간라는 점이다. 따라서 세프턴의 주력사업이 양조(술)와 망원경(여자) 경마(노름)라는 설정은 자본주의와 사유재산의 병폐를 바라보는 빌리 와일더의 명백한 시각을 상징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샤피로에게 배달된 5통의 편지 모두가 (당사자는 전쟁에 참가해 포로가 되어있는데) 자동차회사에서 보낸 할부금 독촉장과 압류통지서라는 점은 아연실색할 지경이지만, 이에 머물지 않고 예기치 않은 반전을 통해 막판까지 미국적 가치관을 뒤집는다는 점에서 와일더의 탁월한 능력은 증명된다. 즉 감독의 의해 내러티브상 우월적 지위를 획득하고는 내기마다 이기며 갖가지 물건을 소유함으로써 다른 이들의 멸시와 의심의 대상이었던 세프턴이, 바로 그 비열한 인물이! 스파이를 찾아내고 던바 대위도 탈출시킨다는 점이 그것이다. 모두가 실패한 일에 유일하게 성공하는 그가 동료들에게 “길모퉁이에서 보더라도 서로 아는 척 하지 말자”는 말을 던짐으로써 막사를 빠져나가는 마지막까지도 냉소주의자의 면모를 유지하는 것은 얼마나 멋진가. 결국 영화 속 세프턴과 동료들 사이에는 어떠한 동족애나 동료애가 스며있지 않으며 때문에 막판에 이르러도 그들을 서로 화해하지 않는다.
아이러니 : 이기적이거나 혹은 이타적이거나
하지만 한 가지 되짚어야 할 것은, 그의 야비한 분투 즉, 지독한 이기주의자의 모습으로 냉소적 언사를 퍼붓는 세프턴의 행위가 수용소 내 필요악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모든 포로들이 그를 비난하면서도 한 편으로 부러워하는 것은 자본가를 바라보는 노동계급의 시선과 궤를 같이 한다. 만약 그의 상업적, 이기적 행위가 없었더라면 술을 마시거나, 러시아 여자들을 망원경으로 훔쳐보거나, 경마를 하며 주말저녁 한 때 나마 즐거울 수 있었을까? 때문에 초조와 불안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포로수용소에서의 세프턴의 존재는 동료의 구호품을 앗아가는 수탈자로 인식되기에 앞서, 지루한 생활에 활력소를 불러오는 유희와 오락의 제공자로서 더 큰 위력을 발휘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의 이기적 행위를 무조건 멸시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앞서 언급한대로 막사 내 스파이를 찾아내는 것도 던바 대위와 탈출에 성공하는 것도 모두 세프턴이라는 점은 그의 이전 행위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결말이지만, 이로써 빌리 와일더의 의도는 명백해진다. 즉, 이기주의가 이뤄낸 이타적 행위의 웃지 못 할 아이러니에 대한 거대한 은유. 거칠게 말하면 (과정과 명분이 어떠했던 간에) 전승국, 특히 미국이 모든 것을 차지하는 The Winner Takes It All에 대한 얼음장처럼 차가운 끄덕임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는 후반부에서 보여 진 세프턴의 행위가 숭고한 의미의 자유를 얻고자 한 것이 아니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논증 가능한데, 이를테면 그가 스파이를 색출한 것은 자신의 누명을 벗으려는 목적일 뿐, 미국을 위한 군인의 사명감에서 발로된 행위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스파이를 찾아내거나, 혹은 동료들에게 맞아 죽거나 일터이다. 그러므로 그의 스파이 색출이 여전히 이기적 행동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시작이 삶에 대한 애착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며, 그가 던바 대위의 탈출을 돕는데 자원하는 것 역시 자신을 스파이로 몰았던 이들로부터 자유롭고 싶었을 것이라는 점은 감안한다면 이 또한 이기적사고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영광과 자유세계의 수호 따위에는 관심도 없이 오로지 “있는 동안 편하게 지낼 수 만 있다면 독일군과 어떤 거래도 불사하겠다”는 세프턴의 이기주의와 자유로운 사고가 장교를 구하고 스스로를 구하며 수용소내의 불신과 불안요소를 제거했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영화의 마지막은 세프턴과 던바 대위의 탈출 이후 행적이 아닌,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하나 둘씩 침상으로 오르던 포로들 모습과 정적을 뚫고 들려오는 휘파람 소리로 끝을 맺는다. (던바와 세프턴의 탈출이 전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관심조차 없어 보이는 와일더의 세계를 도대체 어떻게 해독해야 할까.)
빌리 와일더식 풍자의 수사학
<제 17 포로수용소>에서의 빌리 와일더식 농담과 코미디에 동조할 수밖에 없는 것은, 영화 속 에피소드들이 처절한 현실에 대한 역설적 풍자극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거장이라 이름 붙은 이들의 영화가 흔히 그러하듯 와일더의 영화에는 일반적인 장르 영화들이 넘볼 수 없는 특별함이 있다. 여기서 특별함이란 독일군 대 미군 포로들 간의 대립이 아닌, 포로와 포로들 사이의 대립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이다. 즉 영화는 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향한 눈물겨운 탈옥기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벌여야만 하는 야비한 분투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전쟁영화에서의 미군은 영웅적 행위를 통해 자유의 수호자로 그려진 반면 독일군은 히틀러의 광기에 사로잡힌 무자비하고 악랄한 파시즘의 추종자 형상을 띄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제 17 포로수용소>에서는 이러한 등식이 모조리 뒤집히는데, 암울할 수밖에 없는 포로수용소의 일상을 소동극으로 둔갑시키고 희화화 하는 역설적 시퀀스들이 그러하다. 예를 들어, 4호 막사 담당 슐츠가 아침마다 포로들을 깨우는 장면을 보면 이들 사이에는 오가는 농담과 가시 돋친 조롱이 위험수위를 넘나듦에도 불구하고 유쾌하기만 하다. 잡힌 자와 사로잡은 자의 구분이 모호하고 미군과 독일군의 위치가 불분명할 정도로 혼란 속에서 수용소의 하루가 시작되는데, 이들의 일상자체가 한편의 코미디에 가까울 정도다. 이는 수용소의 현실과는 전혀 무관한 유머러스한 설정을 통해 전쟁에 동원된 자들의 혼란스런 가치관을 드러내려는 의도에 다름 아닐 것이다. 수용소 사령관은 포로들의 탈출로 인해 자신의 업적이 훼손될까봐 전전긍긍할 따름이고, 막사 담당 슐츠는 사령관과 스파이 사이의 연락을 맡고 있지만, 한 때 미국에서 레슬링선수로 활동했던 전력을 자랑하며 포로들을 인간적으로 대해주는 인물로 그려진다. 또한 포로에게 총까지 맡긴 채 배구공을 던지며 즐거워하는 독일병사의 모습은 차라리 안쓰러워 보일 정도다. 감독의 이런 희극적 재능은 영화의 몇몇 캐릭터 때문에 더욱더 빛이 나는데, 영화에서 애니멀과 샤피로를 연기하는 콤비(브로드웨이 뮤지컬 공연 당시에도 같은 역을 맡았던) 로버트 스트라우스와 하비 렘베크의 경우 그들이 벌이는 러시아 여자 포로 목욕탕 전진 사건이나, 샤피로가 베티 그레이블을 잊지 못하는 애니멀을 위해 가발을 쓰고 흉내를 내면서 위로하는 장면들은 (광대라는 별칭에 맞게)영화 전반에 걸쳐 흥겨움을 선사하는 견인차가 되고 있다. (그들의 모습은 와일더의 1959년작 <뜨거운 것이 좋아>에서의 잭 레먼과 토니 커티스를 떠올리게 만든다) 또한 독일군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나의 투쟁》이라는 지침서를 학습한다는 이유로 모든 포로들이 히틀러 흉내를 내며 콧수염을 달고 딱딱한 독일군 영어 악센트를 선보이면서 막사에 들어오는 슐츠를 맞이하는 모습은, 즐겁기도 하지만 동시에 서글픔을 머금게 만드는 장면이기도 하다. 덧붙여 전쟁 전 배우였다는 인물을 등장시켜 개리 그랜트나 클라크 케이블의 멋진 대사까지 곁들여가며 지적인 풍자를 만들어내더니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When Johnny Come Marchin' Home’라는 익숙한 멜로디의 군가를 부르고 춤까지 추는 장면은 빌리 와일더가 장르의 명장임을 확인시켜주는 대목이다.

빌리 와일더는 동시대에 활동했던 그 누구보다 훌륭한 영화들을 많이 만든 장인이었고, <제17 포로수용소>는 그의 화려한 필모그래피에 주렁주렁 달려있는 풍성하고 달콤한 열매 중 하나이다. 50년이 넘은 지금보아도 낡거나 진부하지 않은 이야기와 필요한 것만 취사선택하는 간결함과 멋 부리지 않고 기본에 충실한 카메라 워크까지. 그러니 보다 밝은 채색으로써 빌리 와일더의 세계의 새로운 막을 활짝 열어 제친 이 작품을 어찌 마다할 수 있을까! 해묵은 이야기고 거장의 작품을 볼 때 마다 느끼는 바지만, 현재 한국영화 중에서 50년 뒤에도 살아남아 관객을 흥분시킬 작품이 몇이나 될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던지는 고언(苦言), ‘정말로... 하고 싶은 것에 집착하지 말고 할 줄 아는 것을 해야 한다’는 것. 빌리 와일더가 그것을 온몸으로 증명해주지 않았던가.
- 2006.12.24 백건영(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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