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와일더와 할리우드 (7) [아반티!]

빌리 와일더와 할리우드 시리즈를 6회까지 써놓고 멈춘 이유는, 제2회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 ‘빌리 와일더 특별전’이 들어있어 이왕이면 때를 맞추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번 특별전 목록에는 그의 초기걸작이 아닌 후기 작품들이 대거 편성되었는데, 아마도 대중에게 낯선 영화를 통해 그의 영화세계를 폭넓게 조명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빌리 와일더의 후기 걸작으로 평가받는 1972년작 <아반티! (Avanti!)>는 이태리의 휴양지 이스키아 섬에서 발생한 노년 커플의 죽음을 두고 벌이는 자식들의 이야기와, 이탈리아와 미국의 문화적 차이에 대한 거침없는 조롱과 깔끔한 유머의 퍼레이드가 뒤섞인 작품이다. 또한 부모세대의 로맨스의 족적을 확인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합리적 이성이 빚은 오만과 편견에 대한 속 깊은 성찰을 담아내고 있기도 하다.

유치찬란한 골프복장을 한 사내가 막 헬기에서 내려 출발 직전의 로마행 비행기로 옮겨 타려하는데, 골프장에서 부친의 사망소식을 듣고 시신운구를 위해 막 떠나려는 이 남자의 이름은 윈델 암브루스터 주니어(잭 레먼 분)다. 로마에서 이스키아까지 가는 동안 기차와 페리에서 번번이 마주치는 파멜라 피고트(줄리엣 밀즈 분)가 거슬리지만, 이틀 안에 모든 절차를 마치고 볼티모어로 돌아가기만 하면 그만이다. 이쯤 되어 눈 밝은 관객이라면 두 사람이 무언가 동일한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을 짐작하고도 남을 터이다. 과연 모든 일이 암브루스터의 뜻대로 순조롭게 진행될까? 그러나 한시가 급한 그의 뜻대로 움직여주기는커녕, 섬광처럼 찾아온 뜻밖의 로맨스가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기》에서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까 죽기 전에 여행을 하는 사람이면 꼭 이태리 나폴리를 구경하고 죽으라’는 기행문의 일절을 남겼다. 괴테에게 속과 초속(超俗)의 경계선은 나폴리였다. 즉 나폴리는 세속에서 천상으로 입문하는 홀리 시티(holy city)였던 셈이다. 나폴리 근처에는 로마제국의 흥망을 겪은 수많은 유적과, 푸른 하늘과 아름다운 명승지가 있으며, 남쪽으로는 노래로 널리 알려진 소렌토 거리와 카프리 섬, 그리고 나폴리 만의 서쪽에 위치한 또 하나의 자랑거리, 이스키아 섬이 있다. 이스키아 섬이라고 하면 나이 든 영화 팬들에게 떠오르는 것이, 깜찍한 아역 마리아 레티치아 가조니가 홀아비인 아버지 도미니코 모듀뇨와 약혼자가 있는 젊은 여성 안토네라 루알디를 결합시켜 주는 조숙한 소녀 역을 연기한 추억의 이태리 영화 <푸른 파도여 언제까지나>일 것이다. 영화의 원 제목은 <이스키아에서의 약속 (Appuntamento a lschia, 1960)>인데,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통해서 이스키아 섬을 알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남국의 눈부신 태양에 빛나는 이스키아 섬의 아름다운 풍광과 밝고 경쾌한 칸초네의 선율은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싱그러움과 즐거움을 안겨준 휴양지영화였다. 게다가, 영화에 흘러나오는 미나 마치니의 칸초네 ‘행복은 가득히 ll cielo in una stanza’를 잊지 못하는 올드팬도 많을 것이리라.



매년 8월 15일부터 9월 15일까지 10년 동안 부부처럼 지내오다 급커브 길에서 추락사로 끝맺은 암브루스터의 아버지와 피고트의 어머니 사이에서 피어난 로맨스는 호텔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그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직원들이 암브루스터에게 보여주는 후의는 불륜이라는 단어가 무색하리만치 진심으로 차있다. 그러니 8월의 태양아래 휴양지에서 만난 노인들이 은밀한 로맨스를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하고 지원하기에 이태리인만한 사람들이 또 있을까. (호텔 바에서 춤을 추는 노년 커플들을 보라.) 와일더가 이태리인들과 문화에 대하여 정확히 포착하였다는 것은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설정들, 즉 암브루스터와 카를루치와의 대화, 부르노와 암브루스터 사이에 오가는 대화만 보더라도 쉽게 증명 된다. 때문에 와일더가 이태리의 휴양지를 보여주며 관객에게 전하고자 한 것은 간도 빼줄 것 같은 종업원들의 몸에 밴 친절이 아니라, 그들의 친절이 관광객들에게 긍정적 효과를 미치고 나아가 그곳 사람들의 생업과 연동되는 방식을 살펴보라는 것일 수 도 있다.

덧붙이자면, 노년의 커플이 벌이는 로맨스가 이태리인들에게 아름답게 보이기도 했겠지만, 엄격히 말해서 엑셀시오 호텔 관계자들에게는 돈 많은 단골고객을 위한 당연한 배려였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들이 사라지고 남은 자리에 등장한 2세들을 위한 지배인과 종업원의 친절과 후의는 이태리인들의 삶의 방식이자 철저히 계산된 상술에 근거했다고 봐도 무방하지만, 그것이 만들어내는  화학작용마저도 와일더답지 않던가.


예의 빌리 와일더의 영화가 그러하듯 <아반티!> 역시 부모의 불륜과 동반사망이라는 부정적이며 불편한 상황 속에 두 남녀를 몰아넣지만, 나폴리 일대의 풍광은 그들에게 심각한 애도의 시간마저 허락하지 않는 대신, 그들마저 부모의 흔적을 찾아 나서게 만들고 있다. 이것은 당연히 시종 즐겁게 이야기하며 사랑의 찬가를 불러대는 호텔직원들의 수다스런 모습으로 상징화된 이태리인의 감수성에 기인한다.

한 가지, 주요인물의 국적이 미국, 이태리, 영국이라는 것은 눈여겨 볼만 한데, 즉 2차 대전을 기점으로 세계의 패권을 차지한 미국인의 오만과 우월감에 대하여 와일더식 냉소주의가 어김없이 흐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윈델 암브루스터는 미국 볼티모어의 재벌이고 피고트는 런던의 가게에서 일하는 점원이며, 카를루치는 이스키아 엑셀시오 호텔의 지배인이다. 여기서 와일더는 각자의 문화적 배경을 근거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인물들을 통해 국민성과 개별적 문화의 차이와 소통가능성을 모색하게 된다.

기업가의 운영방식으로 손상된 포도밭 보상금을 종결지으려던 암브루스터가 트로타 일가에게 완패당하는 장면이나, 관을 주문하는 것에서부터 검역증명서를 비롯한 제반 행정절차를 오로지 일가친척의 힘으로 해결해나가는 대단한 지배인 카를루치의 일처리 솜씨는 기실 이태리인들의 삶의 방식과 관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또한 출국허가서 발급과 관련하여 “이것이 당신들이 말하는 이태리의 정의인가?”라는 암브루스터의 말을 한 템포 죽이고는 “그럼 사코-반젠티 사건(필자 註)은 어떻게 된 거죠?”라며 반격할 때의 득의양양한 표정은 이태리 특유의 결속력을 엿보게 할 정도다. 더욱이 1시에서 4시까지의 점심을 방해받지 않으려는 이태리의 관습 때문에 헬기장관리인의 트럭 짐칸에 실려 특급호텔에 도착하는 미 국무성 관료 블로젯의 모습은 웃음을 넘어 묘한 쾌감마저 불러일으키며, 미국인의 우월감에 찬물을 끼얹는 인물로 설정되어 결정적 장면마다 빛을 발하던 (미국에서 강제추방당한)브루노가 마지막 스스로 그 찬란한 천 조각을 뒤집어쓰면서 꿈에 그리던 목적지로 향하는 모습이라니.  


피고트는 여행안내책자에 적힌 문구를 사실로 체험하고는 “이태리는 국가가 아니고 감성”이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사회적 지위에 걸맞게 거창한 장례식을 준비하던 암브루스터가 장례식 이후 벌어질 주주들의 반응과 파업타결, 리콜해결 등 산적한 업무에 회의를 느끼는 것도 이태리인의 감성과 여유로운 풍광에 매료되었다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결국 결정적 순간에 등장한 국무성 관료 조조 블로젯의 무례와 사무적인 언동에(마치 <7년만의 외출>에서 셔먼의 집으로 쳐들어온 톰 매킨지의 모습과 중첩될 정도다) 질린 암브루스터가 결단을 내리는 것도 모두 이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인류는 이성과 합리주의라는 모더니즘 세계에 빠져 살았다. 이런 가운데 욕망을 절제하고 이성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대신 감성의 목마름을 애써 외면해 오지 않았던가. 때문에 영화는, 도시 산업화로 대변되는 기계문명의 숨 막히는 공간에 찌든 현대인들에게 넉넉하고 햇빛 찬란한 지중해 풍광 앞에서 이성의 시대와 결별하고 감성의 시간으로 들어가 보기를 권하고 있는 것이다.



<아반티!>를 시종 이끌며 웃음을 만들어내는 기제는 ‘역할의 뒤바뀜’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공간은 그대로 놔둔 채 인물들의 상황과 모습이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영화의 첫 장면에서 주인공은 헬기에서 내려 비행기로 바꿔 타더니, 옷을 바꿔 입고, 그로인해 여권도 바뀐다. 결국은 호텔에서 만난 피고트와 함께 자신들의 부모가 했던 행위마저 대치하기에 이르는데, 그토록 미국에 가고 싶어 했던 브루노가 미국에 어떻게 가게 되는 지를 놓치지 말 일이다. 이렇듯 영화는 시작부터 바뀌고 또 바뀌는 과정의 연속을 드러내더니 마지막까지도 뒤바뀜을 통해 시원스런 웃음을 전달한다. 그러므로 영화 내내 수 없이 들리던, 이태리인(호텔종업원)의 “페르메소(실례합니다)”와 미국인(암브루스터)의 신경질적인 대답 “아반티!(들어오세요)”는 미국과 이태리, 두 문화 사이의 상호소통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할 수 있다. 영화는 이러한 가능성에서 한 발 더 나가더니, 오로지 “아반티”만 외치던 암브루스터가 욕실의 체중계에 올라선 피고트에게 “페르메소”라며 묻는 장면을 통해 뒤바뀜이 빚어낸 아름다운 프로포즈를 연출해냄으로써 와일더의 영화가 아니면 쉽게 맛볼 수 없는 빛나는 순간을 일궈낸다.


그동안 와일더가 보여준 캐릭터의 흥미로움이나 이야기를 따르면서 즐거움을 찾아온 이들에게 <아반티!>는 더 없는 즐거움을 제공할 것인데, 그것은 그림엽서처럼 아름다운 이탈리아의 풍경에 더해진 주인공과 그 주변인들이 알려주는 다른 삶의 모습을 디자인하는 방법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부모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한 자리에 모인 인물들과 그들을 둘러싼 평화롭고 한적한 나폴리의 휴양지를 배경으로 펼쳐내는 이 사려 깊고 유쾌한 드라마는, 단언컨대 와일더 영화의 특질을 더할 나위 없이 맛볼 수 있는 수작이다. 지중해의 풍광 위에 이태리인들의 감성과 빌리 와일더가 만났으니, 그 특유의 유머가 어찌 달콤쌉사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註 : 사코-반젠티 사건 Sacco-Vanzetti case은 1920년에 매사추세츠 주의 공장에서 발생한 살인강도사건의 범인으로 이탈리아계 이민자인 사코와 반젠티를 검거하여 사형집행까지 마쳤지만, 1959년에 진범이 잡힘으로써, 이민자에 대한 미국의 배타적 성향이 드러난 미국사법사상 최악의 오심으로 기록된 사건 중 하나이다)  
2007.02.02
백건영(영화평론가)
편집장

by 달의궁전 | 2007/10/09 10:30 | 네오이마주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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