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와일더와 할리우드 (6) [하오의 연정]

1950년대 할리우드의 고민은 TV, 스포츠나 볼링, 모터보트 타기, 하이파이 전축세트 따위로 부터 어떻게 대중의 여가 시간을 빼앗느냐 라는 것이었다. 관객을 끌기 위한 50년대 할리우드의 노력은 다양한 장르의 진화를 낳았고 이런 배경에서 탄생한 장르가 가족 멜로드라마이다. 기존의 멜로드라마에 싫증이 난 관객들, 특히 그 중에서도 남성 관객들을 붙잡아 두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한 가족 멜로드라마는 완고한 부친, 반항하는 자녀, 이런 와중에 닥쳐오는 가정 질서의 붕괴 등이 단골 줄거리였다. 특히 직장에서 억압받고 집에서는 자녀와의 갈등으로 고뇌하는 처량한 중년 남자들의 이야기는 많은 남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해 가족 멜로드라마는 흔히 '남성용 최루영화'(Male Weepie Movie)라는 애칭이 붙기도 했다. 또한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의 쇠퇴가 1950~60년대에 걸쳐 지속되는 동안, 작가주의 영화 이론이 대두됨과 동시에 고다르나 펠리니 같은 유럽 영화감독에 대한 대중의 관심 또한 고조되었다. 영화작가라는 개념이 꽤나 오래 된 개념이기는 하지만, 영화이론과 비평, 때로는 영화창작을 떠받치는 주요 구성 개념이 된 것은 2차 대전 이후에 이르러서였다. 프랑스에서 작가주의는 기존 체제의 경직된 제작 질서 및 상투적인 내러티브 방식에 대한 누벨바그 감독들의 공격과 밀접히 결합되어 있다. 제작자에 대해 감독의 권리를 수호하려는 누벨바그 감독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쟁취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와 맞물려 1962년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많은 영화 기술자와 배우, 그리고 감독들은 유럽으로 눈을 돌렸고, 특히 로마는 테베 강변의 할리우드라 불릴 정도였는데, 빌리 와일더의 57년 제작한 두 작품([하오의 연정] [저것이 파리의 등불이다_ The Spirit of St. Louis]) 모두 파리 로케이션으로 이뤄졌다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하오의 연정

클로드 아리아넷의 소설 ‘알리아느’를 영화로 만든 빌리 와일더의 1957년 작 [하오의 연정_ Love In The Afternoon]은 자신의 스승 에른스트 루비치의 작법과 여러 면에서 유사성을 지닌 작품이다. 1933년 나치를 피해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와일더는 자신이 꿈에 그리던 영웅이자 당대의 코미디감독 에른스트 루비치의 각본을 쓰게 되는데, 이때 쓴 각본 중 하나가 [푸른 수염의 8번째 아내_ Bluebeard’s Eighth Wife](1938)이며, 따라서 [하오의 연정]의 기본적 설정이 [푸른 수염의 8번째 아내]와 같다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흙먼지 날리는 황야의 총잡이는 정유, 건설 재벌이 되어 흰색 연미복에 보우타이를 매고는 프랑스 파리의 한 복판에서 젊은 유부녀와 밀회를 즐기고, 같은 시간 방돔 전망대에서는 또 다른 사내의 카메라 셔터가 쉼 없이 터지고 있다. 어디를 가나 사랑으로 가득한 도시라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입맞춤에 여념이 없는 남녀노소 연인들의 모습을 비추면서 빌리 와일더의 열네 번째 연출작 [하오의 연정]은 그렇게 시작한다.

영화의 스토리는 지극히 간단하다. 파리 출장 중인 플래너건은 (자신의 남편이 런던출장 중이라고 믿는)유부녀와 리츠 호텔 스위트룸 14호에서 밀회를 나누고 있으며, 샤바스를 찾아온 바람난 아내의 남편은 플래너건을 죽이려는 결심을 굳힌다. 부정한 행위에 대한 불법적 응징이 현실이 되려는 순간, 아리안느는 두 사람이 밀회 장소인 호텔방에 난입하고는 정부역할을 자처함으로써 그를 구해낸다. 결과적으로 남편의 사랑을 확인함으로써 유부녀는 가정으로 돌아가고 둘 사이의 애정을 회복시킨 공로는 아리안느에게 섬광 같은 사랑으로 보상주어 진다. 이렇듯 영화는 불륜사건 전문탐정인 클로드 샤바스(모리스 슈발리에 분)의 딸 아리안느(오드리 햅번 분)와 미국의 백만장자 바람둥이 플래너건(게리 쿠퍼 분) 사이에서 벌어지는 애정의 줄다리기를 와일더 특유의 터치를 가미하여 그려내고 있다. 여기서 플래너건이 아리안느를 유혹하는 장면의 대사를 잠시 살펴보자.    

플래너건 : 파리에서의 마지막 밤을 혼자 보내게 하진 않겠죠?
아리아느 : 총을 갖고 왔던 분이 아내를 소개시켜 준다고 했잖아요.
플래너건 : 그 여자보다는 당신이 훨씬 매력적이에요.
아리아느 : 그럼 스톡홀름에 있는 쌍둥이 자매한테 가세요!
플래너건 : 그 둘을 합친 것보다 당신이 더 매력적이에요.
아리안느 : 말이 별로 없는 편이시라더니...
플래너건 : 8시 어때요?
아리안느 : 안돼요.
플래너건 : 9시는요?
아리안느 : 안돼요. 너무 늦어요.
플래너건 : 5시는요? 4시는?
아리안느 : 오후에요? 일은 언제 하시려고요?
플래너건 : 바쁘지 않을 때 하죠. 올 수 있죠?
아리안느 : 당신은 절대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들었어요.
플래너건 : 그럼 둘 다 노력합시다. 당신은 4시에 여기 오기 위해,
난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아리안느 : 안녕히 계세요. 플래너건씨.
플래너건 : 잘 가요. 말라깽이 아가씨.



사랑은 이렇게 소리 없이 찾아온다고 했던가. 호기심에서 시작된 인연은 숙명적으로 서로를 옭아매기 시작하는데, 나이 많은 남자와 젊은 여인, 황야의 보안관 출신과 로마를 활보하던 공주, 무거운 첼로 케이스를 직접 들어야 하는 평범한 여인과 손가락 하나로 모든 것을 움직일 수 있는 백만장자 사이에서 대극적 환경을 유머러스하게 꾸며가는 와일더의 미장센은 무려 20여 차례나 등장하는 집시밴드와 함께 절정의 힘을 발휘한다. 장난스럽지만 하이든 첼로 협주곡처럼 우아하게 또는 와인과 캐비어로 장식된 식탁처럼 화려하지만 집시밴드의 ‘매혹의 왈츠’처럼 소박하고 매혹적인 미장센은 상대적으로 빈약한 공간과 이야기의 단조로움을 매워주는 기제로 충분히 활용됨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와일더가 즐겨 사용했던 모티브 즉, 지근거리에 있는 인물들로부터 사건이 시작되고 결말지어지는 작법에서 어떠한 패턴을 읽었다면 이 작품역시 예외가 아님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남성편력을 자랑하면서 희대의 바람둥이 플래너건을 희롱하고 초조하게 만든 여대생이 한 때 그의 뒤를 캐면서 방대한 자료를 수집했던 샤바스의 딸이었다는 것과, 그녀의 뒷조사를 바로! 샤바스가 맡는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이렇듯 너무 가까운 곳에 있기에 의심할 바 없이 토로하고 제공된 정보와 단서를 통해 시작되는 이야기들이 불러일으키는 가벼운 페이소스는 드라마의 완성도에 일조하거니와 메시지 전달과정의 간소화를 이뤄내고 있다. 또한 특별한 긴장감 없는 이 드라마에서 웃음을 만들어내는 것은 각각의 인물들이 자신을 이루는 배경을 전복하는 상황의 아이러니를 통해서인데, 사립탐정 샤바스가 자신의 딸을 조사해야하는 상황, 희대의 바람둥이가 순진한 처녀의 장난으로 인해 속내를 열어 제치는 상황, 교향악단의 첼로연주자가 집시밴드 곡을 입에 달고 사는 상황이 그러하다.

거장의 영화라고 모두 걸작이지 않듯, 빌리 와일더의 영화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겠으나, 이야기와 인물과 공간의 상보적 관계를 이용하고 조합하는 능력을 통해 어떤 작품이라도 최소한 기본수준을 유지한다는 데서 그의 비범함은 발견된다. 달리 얘기하자면 [하오의 연정]은 그의 걸작 목록에 들어가기에는 다소 부족한 작품이지만, 오드리 햅번의 청초한 전성기를 볼 수 있다는 점과 보안관에서 중년의 신사로 탈바꿈한 게리 쿠퍼를 통해 와일더에 씌워진 루비치의 그림자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얘깃거리를 제공한다는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플랫폼의 이별 장면이다. 구슬 같은 눈물을 머금은 아리안느가 출발하는 열차를 뒤쫓고, 열차 승강구에 서있는 플래너건은 그런 그녀를 바라만 볼 뿐이다. 점점 속력이 붙는 열차를 바라보며 ‘기어이 헤어지는 것인가’라고 낙담하는 순간, 플래너건이 손을 뻗어 아리안느를 열차의 승강구로 끌어 올린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그녀의 아버지와 관객들 모두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만들며 영화는 감미롭게 막을 내린다. 이 영화는 사랑의 힘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꿈을 제공하고 있지만, 그저 착하고 예쁘기 때문에 왕자와 결혼 하게 되는 신데렐라의 꿈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불현듯 찾아 올 사랑에 대한 기대와 설렘의 꿈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 여느 로맨틱 코미디와 차이가 있다. “우리가 첫 촬영을 하던 날 그가 촬영장에 나타났을 때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그를 좋아하게 됐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던 와일더의 회고대로 오드리 햅번의 청순한 매력은 더 재삼 거론하는 것이 무의미 할 정도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의 눈물어린 자기고백은 호사가들에 의해 소위 ‘인상 깊은 플랫폼 신’으로 등재되는 데 톡톡히 일조하고 있다.

거듭 생각해도 와일더의 드라마는 어렵지 않다. 그 대상이 할리우드의 자기반영이던, 탐욕에 지배당한 인간의 욕망이던 또는 미국자본주의에 대한 신랄한 고발이던. 이는 와일더 스스로 욕망했던 스승 에른스트 루비치와는 다른 방식으로 확고한 자기세계를 펼쳐냄으로써 가능했다. 다만 50년대 중 후반 만들어낸 세 편의 영화들, 이를 테면 <사브리나> <7년 만의 외출> <하오의 연정> 등 낭만적이고 성적 함의가 가득한 작품들은 그 수법과 웃음의 방식에서 대단히 루비치적인 것이었고 와일더 스스로도 이 점을 인정한 바 있다. 에른스트 루비치의 코미디가 따스한 인간애를 바탕으로 유머러스한 세계관을 펼쳐내고 있는데 반해, 와일더는 보다 신랄한 풍자를 사용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다만, [하오의 연정]도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어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이를테면 영화 속 모든 자본의 이동이 미국의 재벌 플래너건에서 시작됨을 알 수 있는데, 바람난 아내의 조사를 의뢰한 남자가 지불하는 5만 프랑의 수임료로부터 리츠 호텔에서 벌어지는 호화로운 식사와 집시밴드의 동원이 그러하다. 또한 아리안느의 입을 통해 진술되는 남성들의 선물공세도 따지고 보면 플래너건의 조바심을 이끌어내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영화 후반, 절망한 플래너건과 와인캐리어를 주거니 받거니 하더니 기어이 사우나까지 동행하는 집시밴드의 모습은 자본주의의를 바라보는 와일더의 세계관을 극단적으로 상징화시킨 장면에 다름 아니다.

이렇듯 와일더의 영화에서 발견되는 자본주의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미국에 대한 냉소는 괜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어머니와 할머니가 어디에서 죽었는지도 모른다. 오스트리아 출신 유태인들은 대부분 아우슈비츠에서 죽었기 때문에 그들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믿을 뿐이다. 루즈벨트는 그곳에서 벌어진 일에 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는 와일더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와 그의 동생 윌리는 미국에서 자리를 잡았지만, 유럽에 남아 있던 그의 유태인 어머니와 할머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어갔기 때문이다. 생전에 “고향에 돌아갈 생각은 없다. 미국은 내가 죽을 곳이다”라고 말하면서도 그는 침묵했던 미국을 용서하지 않았다. 골든 보이 윌리엄 홀덴은 “와일더의 마음속엔 칼날이 가득했다”고 말하기도 했을 정도이다.



다시, 와일더를 떠올리며

1906년 태어나 9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 빌리 와일더는 아카데미에 21번 후보에 올라서 5개의 트로피를 가져갔다(감독상 2번, 각본상 3번) 최근 미국시나리오작가협회가 선정한 ‘할리우드 최고의 시나리오 101편’중에는 네 편의 와일더 영화가 있는데, 이는 우디 앨런과 프랜시스 코폴라와 동률 1위의 기록이기도 하다. 사실 그는 괴팍한 작가였다. 그는 혼자 작업하는 걸 너무나 싫어했지만, 파트너 작가에겐 언제나 불만과 욕설을 퍼붓곤 했다. 그럼에도 빌리 와일더가 파트너와 옥신각신하며 완성해낸 대사들은 그전까지는 만날 수 없었던 촌철살인과 위트의 향연이었다. 거의 모든 장르에 통달한 '드라마투르기의 제왕'이었던 그는, 마를렌 디트리히를 “쫙 빠진 다리를 가진 마더 테레사”라고, 마릴린 먼로를 “어떠한 해답도 없는 영원한 퍼즐”이라고 요약하는 촌평가이기도 했다. 또한 그는 “요즘은 영화 만들 때 시간의 80퍼센트는 비즈니스에, 나머지 20퍼센트만을 실제 제작에 사용한다.”며 할리우드를 쏘아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말이 당시의 할리우드에만 국한되는 것이겠는가. 영화의 완성도보다 단기흥행을 목적으로 마케팅에 열을 올리는 한국영화 앞에 놓인 강퍅한 현실을 보면서 빌리 와일더가 생각나는 것도 이런 때문이다.


연재를 마치면서

빌리 와일더의 영화세계를 단편적으로나마 탐색하겠다며 [선셋 대로]를 쓰기 시작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끝이라니. 예정대로라면 3편으로 끝났어야 할 것을 욕심을 부려 늘려놓았고 연재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하오의 연정]을 완성했다. (애초에 생각했던 [키스 미 스투피드]와 [빅 카니발] [뜨거운 것이 좋아]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는 후일로 미룰 생각이다.) 지난 2개월 여간 빌리 와일더의 작품들과 만나는 동안 더 없는 공부를 할 수 있었으며 거장의 그늘이 얼마나 넓고 짙은지를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정말로! 한 없이 행복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앎의 미천함을 빙자하여 거장의 세계를 왜곡한 것은 아닌지 심히 근심스럽기까지 하다. 이는 그만큼 이 공간을 찾는 독자들의 수준이 높고, 다양한 층위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인데, 혹시라도 오독의 소지가 있거나 필자가 미처 간파하지 못한 부분이 있으면 언제라도 조언해주시길 바랄 뿐이다. 후속 글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거장 루키노 비스콘티의 작품세계를 살펴볼 생각이다.
2007.01.07
백건영(영화평론가)
편집장

by 달의궁전 | 2007/10/09 10:30 | 네오이마주 | 트랙백 | 덧글(0)

빌리 와일더와 할리우드 (5) [7년만의 외출]

1955년 빌리 와일더와 마릴린 먼로가 만난 첫 번째 영화 [7년만의 외출]은 의심할 바 없이 마릴린 먼로에 의한 마릴린 먼로의 영화이다. 이 영화를 이야기할 때 빌리 와일더보다 마릴린 먼로의 존재감을 부각시킬 수밖에 없는 이유는, 셔먼의 공동주택 유리문에 그림자로 등장하는 첫 번째 장면으로부터 피서지를 떠나는 그를 창문에서 배웅할 때 까지 영화에는 온통 먼로의 향취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위력은 셔먼에게 Dazzle-Dent치약 CF를 시연하는 장면 하나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던가) 또한 이전 와일더의 작품들이 미국적 가치관과  할리우드에 대한 삐딱한 시선을 견지해온 데 반해 [7년만의 외출]에서는 그것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비록 코미디 장르 안에서 미국 중산층 남성의 욕망을 탁월하게 풀어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기는 하지만 달리 보자면, 영화에서 1950년대 미국이 전 세계에 전파한 행복의 척도(미국식 삶의 방식이 곧 행복한 삶이라는)에 대한 고민 없는 동조로 읽혀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당대 미국의 중산층의 생활양식과 소비패턴의 탐구라는 또 다른 텍스트를 함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시할 가치를 지닌다고 하겠다. 이제부터, 무의식으로 용솟음치는 기혼남성의 일탈욕망을 통해 세계대전 이후 풍요와 안정화에 안착한 미국사회를 풍자하며 전경화를 시도한 와일더의 세계를 읽어본다.  


영화는 (맨해튼 원주민들의 여름휴가 풍속을 보여주는 기발한 시퀀스에 이어) 결혼 7년차인 성실한 출판사 편집자 리처드 셔먼(톰 이웰 분)이 아내 헬렌과 아들 리키를 휴가지로 보내는 기차역 신으로 시작된다. 여름이면 미국의 모든 남편들은 가족을 휴가지로 보내고는 자신들은 찌는 사무실에서 돈을 벌고 가장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한다. 당연히 보다 행복한 가정을 위한 안락한 여건을 채워 넣기 위해서이다. 아들이 빼놓고 간 ‘노’를 들고 집에 돌아와 모처럼 편안한 시간을 보내려는 셔먼에게 (2층에서 떨어진 토마토 화분처럼)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지게 되면서 결혼 7년차 남자의 억압된 욕망은 상상과 현실을 넘나들게 된다.



주인공인 리처드 셔먼은 스스로 성실한 가장이라 여기는 인물이지만, 2층에 잠시 머물게 된 그녀(마릴린 먼로 분)를 보자마자 단숨에 빠져들더니 갖은 상상으로 자신의 욕망을 합리화시키며 일탈을 꿈꾸는 인물인데, 밤 10시에 전화 하겠다는 아내의 말이 자신에 대한 불신 때문이라고 생각하더니 결국 자신의 남성적 매력에 여성들이 빠질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과대망상을 펼쳐내기에 이른다. 이를테면 자신의 비서인 모리스와 간호사 핀치, 아내의 친구 일레인까지 모두 자신에게 대시를 했다는 식의 비약적 논리로 남성성의 건재를 확인하려는 행위가 그것이다. 하지만, 초라하게도 더 완벽하게 나르시즘에 빠진 그녀에게 압도당하고 굴복당하며 헤어 나오질 못하는 신세가 되는데, 이 모든 것들은 셔먼의 직장과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빌리 와일더의 영화가 언제나 그러했듯이 그는 특정한 상황 속에 사물들과 인간들을 배치해왔다. 그리고 그 속에 어떤 강력한 운동에너지를 가지는 사건을 개입시킨다. 비뚤어진 애정으로 인한 청부살인, 포로수용소에서의 동료포로착취, 승진을 위한 아파트 대여, 동생의 여자를 뺏기 위한 작전들은 알고 보면 질적으로 나쁜 사건들(범죄를 저지르고 동료의 믿음을 이용하거나, 동료들을 착취할 만큼 하고 탈옥하거나 바람을 피려고 한다. 또는 사랑하는 핑계로 집안의 부를 그대로 유지하려 한다)이지만 결국 빌리 와일더는 그 곳에서 자신만의 고유함을 뽑아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와일더가 50년대 미국관객의 구미를 맞출 수 있었던 요인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즉, 당대 미국 중산층의 생활상을 보여줌으로써 물질적 풍경에 대한 광범위한 인식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이는 국가목적과 자기만족에 의해 가려진 문제점(빈곤과 소수자)을 은폐하려는 미국의 중산층의 기호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전후 시대에서 가장 두드러진 사회발전 중의 하나는 중간 계급적 생활양식과 견해가 인구의 많은 부분에게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미국의 중간계급은 이전 어느 때 보다도 더 커지고 강력해졌으며, 더 자아의식이 강해졌다. 1950년대 중간계급 문화의 중심에는 증가일로에 있던 소비재에 대한 몰입이 존재했다. 그것은 번영의 증대, 증가하던 상품의 다양성과 이용 가능성, 그리고 그러한 제품에 대한 수요를 창출하던 광고의 결과였다. 그것은 또한 소비자 신용의 증가의 결과이기도 했는데, 소비자 신용은 외상게정을 회전시키던 신용카드의 발달과 할부금 계획을 통하여 1945년과 57년 사이에 800%나 증가했다. 이 같은 번영은 자동차 같은 오랜 소비자의 열망에 기름을 부었으며, 디트로이트는 끊임없이 번쩍이는 스타일과 장식으로 호경기에 대응했다. 소비자들도 식기건조기, 일회용 쓰레기주머니, 텔레비전, 고성능 스테레오레코드 플레이어 따위의 새로운 제품들의 발달에 기꺼이 응했다.

또한 1950년대를 기점으로 불어 닥친 도회지 개발 붐은 1960년에 이르러 전인구의 3분의 1을 교외 지역에 살도록 만들었다. 왜 그렇게 많은 미국인들이 교외로 이동하기를 원했을까? 가족들이 종종 결별하게 되거나 파괴되었던 전쟁(2차 세계대전)으로부터 5년이 지난 후, 전후 미국인들은 가족생활에 엄청난 중요성을 부여했다는 것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교외지역은 가족들에게 그들이 도시에서 발견할 혹은 유지할 수 있던 것보다 더 큰 주택을 제공하여 더 많은 자녀를 키우는 것을 다 쉽게 만들었다. 교외지역은 사생활을 제공했으며, 그것은 미국의 중간계급이 열망하던 새로운 소비재들, 즉 가구들, 자동차, 배, 옥외가구, 기타 제품들을 위한 공간도 제공했다. 훗날 교외 지역은 순응성(conformity), 획일성, 고립감을 불러왔다고 공격 받았지만, 50년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주로 비슷한 연령과 배경을 지닌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에 산다는 생각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우정과 사교모임을 더 쉽사리 찾을 수 있었다. 특히 여성들은 풍족한 삶을 공유하는 대도시 근교의 직장 없는 엄마들의 존재를 종종 높이 쳐주었다. (<스텝포드 와이프>의 배경인 코네티컷 외곽 주거단지 스텝포드의 아내들 모습을 기억해보라.)

다시 영화로 돌아가면, 셔먼의 자랑대로 그의 집은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고, 피아노와 간이 홈 바와 레코드플레이어와 뒷마당의 공간까지 갖추고 있는 현대식 공간이다. 셔먼과 그녀 사이에 사건의 단초가 되는 것이나 그녀를 유혹하는 동안 각종 상상을 가능하게 만든 것 모두가 현대식 소비재들과 연결되어 있는 셈이다. 이를테면 그녀의 도착을 기다릴 때 레코드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과 그녀와 첫 키스를 위해 젓가락행진곡을 치는 피아노도 물론이지만, 무엇보다 그녀를 들뜨고 신나게 만든 것은 열대야에 잠을 못 이루고 속옷을 냉장고에 넣었다 입어야 하는 자신의 방과는 달리 셔먼의 집에는 에어컨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각 방마다. (심지어 화장실에도!) 그러니 친절하고 지적이며 사려 깊은, 게다가 유부남이어서 부담도 없는 셔먼에게 그녀가 마음을 열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터이다. 이제 마음만 먹으로 그녀를 안을 수도 키스할 수도 또 그 이상의 관계를 맺을 수 도 있는 지점에 셔먼은 도달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일탈 욕망이 쉽사리 결행될 리가 만무하다. 7년간 충실한 가장으로 자리를 지켜오지 않았던가!

「유혹을 없애는 유일한 길은 그 유혹에 항복하는 길 뿐이지.
가장 추악한 죄는 현실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저질러지는 거라네.」
오스카 와일드 《도리어 그레이의 초상》

셔먼이 자신의 욕망을 끄집어내고 상상과 실현을 오가는 동안 영화는 두 개의 관점을 유지하는데, 이를테면 그의 불안과 다가올 파국에 대한 강박증을 아내인 헬렌에게 투사시킴으로써 아내의 불륜을 기정사실화고 이를 빌미로 남성의 충동에 명분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브루베커 박사의 초고를 읽던 셔먼이 “7년차 남성이 위기감을 느낀 사례가 84.6%이며 여름에는 91.4%로 증가한다”는 대목에서 보여주는 행위는 자신의 부정한 행위를 합리화하고 죄책감을 완화시키려는 목적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가 검토하는 원고가 ‘인간의 억압된 욕망’에 대한 이야기이고 사장이 가을에 재출간을 지시하는 책이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인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이렇듯 와일더는 주인공인 셔먼의 직업에 걸맞게 두 권의 책을 통해서 그의 욕망을 일깨우다가 부숴버리는 반복적 행동을 통해 실재와 관념의 간극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린다.


“누구나 또 다른 마릴린 먼로를 만들려고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앞으로도 불가능할 것이다. 마릴린 먼로는 오직 하나이며 이 세상에 넘치는 것은 모조품(imitation)뿐”이라는 와일더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또한 의심할 바 없이 <7년만의 외출>은 마릴린 먼로를 빼고는, 그녀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영화이다.




설사 이 영화를 보지 못했을지라도 이 유명한 장면을 모르는 영화팬이 있을까? 지하철 환기구로 불어온 바람에 먼로의 치마가 올라간 모습은 할리우드 영화사상 최고의 섹시한 장면 중 하나로 꼽히지만, 구경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가운데 야외에서 촬영한 그 날 이후로 남편인 조 디마지오와 먼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먼로는 그와 이혼했고 극작가인 아서 밀러와 재혼했다. 1950년대 뭇 남성들의 마음을 헤집었던 섹스 심벌이었지만 정작 그녀 자신이 이 거추장한 딱지를 떼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은 아이러니이다. 7년 만에 맞은 해방감에 들떠 부적합한 상대인 그녀와의 일탈을 꿈꾸는 셔먼과 마찬가지로, 어울리지 않는 상대였지만 지적 갈증에서 비롯된 아서 밀러와의 7년간 결혼생활은 오히려 그녀의 불행을 자초했다는 점에서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 비평가인 다이애나 트릴링(Diana Trilling)은 “마릴린 먼로를 죽인 것은 결국 미국 대중문화와 할리우드”라고 했는데, 대중문화를 적절하게 이용하고 자기편으로 만들어간 90년대의 문화아이콘인 마돈나와는 달리, 마릴린 먼로는 자신이 사회적 관습과 이분법적 경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그렇게 쓰러져갔다. 그녀 자신이 속했던 대중문화와 그토록 희구했던 고급문화 사이에 놓인 세찬 강물에 휩쓸려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던 것이다.

<7년만의 외출>에서 마릴린 먼로가 맡은 배역의 이름은 없다. 즉 ‘The Girl’로 표기된 역할을 맡았다는 것인데, 이것은 극중 이름이 중요하지 않음을 뜻하거니와 마릴린 먼로라는 이름만으로도 영화의 완성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꼼꼼하고 철두철미한 성격을 지닌 각본가 출신의 와일더가 취한 태도라고는 믿기지 않지만, 영화를 감상하다보면 정말로! 그녀의 이름이 없었다는 사실조차 지각하지 못할 정도이다. 즉, 하얀 치아를 드러내고 웃기만 해도, 풍만한 가슴 선을 드러내어 고개를 숙이거나 특유의 눈웃음으로 친근감을 표시하기만 해도 충분할 정도로 그녀는 셔먼의 선창에 메아리로 화답하면 그만이었다는 말이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술과 담배를 끊고 제 아무리 가족 사랑과 자신의 성실함을 외쳐댄다 한들 꽃처럼 향기롭고 요부처럼 농염한 그녀의 몸짓을 이겨낼 방법이 있었겠는가. 그러니 셔먼이 거울 앞에서 추하게 변한 상상 속 자신을 바라보며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떠올리는 것도, 한편으로는 자신보다 16살이나 어린 숙녀 앞에 선 유부남의 초라함을 대변하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오죽하면 “금발미녀라면 마릴린 먼로라도 되느냐”는 온전한 찬사를 영화 속 대사로 동원했을까.



영화에서 셔먼이 갈등선상에 놓일 때 마다 보여 지는 아들의 ‘노’는 수호자의 홀(笏)처럼 그의 곁에서 멀어지는 법이 없다.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걸려온 전화에서 아내의 언급을 통해, 결정적 순간을 앞둔 셔먼의 눈에 띔으로써, 그녀가 토스트를 만드는 동안 방문한 맥킨지의 용건을 빌어서) 영화가 종반으로 갈수록 와일더의 영리함은 빛을 발하는데, ‘일탈에 몸을 던져 유혹 앞에 투항하느냐, 아니면 가정을 지키느냐’라는 명제를 던져놓고는 셔먼의 선택을 요구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셔먼으로 하여금 유혹과 타협할지언정 항복은 하지 않도록 만듦으로써 외도를 꿈꾸는 평범한 가장에서 미국적 가치관의 수호자적 위치로 격상시켜버리는 과정에서의 이중적 태도가 이를 설명하고 있는데, 와일더는 노를 들고 휴가지로 떠나는 셔먼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의도를 간명하고 명백하게 드러낸다. 즉, 일탈의 짜릿함도 성취하고 가정도 지킨다는 이중적 해피엔딩을 위한 선택(필자 註)이 그것이며 이마저도 지극히 와일더적이라 할 수 있다.

결국 <7년만의 외출>을 통해 당대 미국사회가 읽고 싶었던 텍스트는 중산층 가장의 일탈적 욕망을 통해 시각적 충족과 더불어 (와일더의 의도가 어떠했던 간에)가정의 소중함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관객이 원하는 만큼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와일더의 능력이 입증되는 순간이지만, 어쩌면 와일더는 ‘아는 만큼만 보려한다’는 또 다른 역설을 언술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註 : 이러한 와일더의 선택에 대하여 필자는, <밀드레드 피어스 (1945)>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린다. <7년만의 외출>의 엔딩 신을 달리 보자면, 경찰서에 딸을 남겨놓고 남편과 재결합 하는 <밀드레드 피어스>의 마지막 장면에서 (여성은 남성 안에서야 비로소 행복할 수 있다는)가부장적 시선을 찾아냈던 페미니즘비평가들의 비판에 대한 와일더식 역설적 대답이라는 것이다. 밀드레드가 딸을 철장에 가둬놓고 남편에게 돌아간 반면, 셔먼은 그녀를 2층 창안에 방치한 채 가족에게 돌아간다는 차이가 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2007.01.02
백건영(영화평론가)
편집장

by 달의궁전 | 2007/10/09 10:29 | 네오이마주 | 트랙백 | 덧글(0)

빌리 와일더와 할리우드 (4) [제 17 포로수용소]

2차 대전이 벌어지자 미국의 감독들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전쟁에 참여하여 기록영화를 찍게 된다. 비록 미 국방성 자체가 직접적인 제작자나 선전 영화의 개발자가 되지는 못했으나 영화제작이 군 최고사령부의 관심에 힘입어 진행되었다. 프랭크 카프라, 존 휴스턴, 존 포드, 윌리엄 와일러 같은 감독들이 (독일이 그러했던 것처럼) 군대를 따라다니며 미군을 위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이를테면 조지 스티븐스는 다하우(Dachau Concentration Camp)에서 <베를린으로 돌격>을 찍어 실제 영상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새뮤얼 풀러가 <빅 레드 원 (1980)>에서 과감하게 그것을 삽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전쟁의 이면을 탐색한 영화는 거의 없었다. 그나마 윌리엄 와일러의 <우리 생애 최고의 해 (1946)>가 재향군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사회적 이슈가 될 만한 드라마를 만드는 것도 이 작품으로 끝이었다. 왜냐하면 매카시를 중심으로 할리우드 내 적색분자 색출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국식 전쟁영웅이 나오지도 않고, 완벽한 탈주극도 아닌 한 편의 소동극처럼 읽혀질 법한 <제 17 포로수용소 (1953)>가 이 시점에서 만들어진 것은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달리 말하면 빌리 와일더의 유머와 신랄한 풍자의 수사가 경지에 올랐음을 반증한다고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빌리 와일더의 영화세계를 연대기별로 구분하자면, <비장의 술수 (1951)>의 상업적 실패로 인해 자본주의 미국사회에 대한 음울한 수법과 저변에 깔린 냉소주의가 막을 내리기까지의 느와르 및 사회성 짙은 드라마 시대와, 더 은근하면서도 교묘하게 표면의 웃음을 통해 자신의 냉소를 감추는 방법을 택하게 되는 코미디 드라마의 전성시대로 나눌 수 있다. <사브리나 (1954)> <7년 만의 외출 (1955)> <하오의 연정 (1957)> <뜨거운 것이 좋아 (1959)> <아파트 열쇠를 빌려 드립니다 (1960)> <키스 미 스투피드 (1964)>에서 볼 수 있듯이 도회적 삶 속에서 웃음을 만들어낸 와일더의 능력은 대부분 블랙코미디에서 그 빛을 발하였다. 장르라는 익숙한 형식 속에 주제의 낯설음을 버무려내던 그의 영화는 당대 사회의 위선을 비틀고 까발리는 동안 웃음과 긴장감을 동시에 획득했던 것이다. <제 17 포로수용소 (1953>)로 시작된 빌리 와일더의 코미디 드라마는 허위의식과 익숙지 않은 상황들을 코앞까지 바짝 들이대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도록 만들고 있다.  


<제 17 포로수용소_ STALAG 17.>

“전쟁을 다룬 영화는 많았지만 전쟁포로에 관한 영화는 전무했다”는 오프닝 타이틀에서 볼 수 있듯, <제 17 포로수용소>는 전쟁포로에 관한 최초의 영화이다. 여기서 빌리 와일더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기적인 인물 세프턴(윌리엄 홀든)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니컬한 시선을 드러내면서도 브로드웨이에서 대박을 쳤던 원작의 배우들을 끌어들여 코믹한 휴먼드라마를 빚어내게 된다. 이러한 그의 솜씨는 분명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와일더 영화의 정수라 할 만 한 것이고, <제17 포로수용소>는 그 정수의 본격적인 시발점이 되어 주었던 영화임에 틀림없다. 이 작품은 위대한 장인의 기량이 만개한 순간을 목격할 수 있다는데서 또 다른 의미를 찾을 수도 있는데 일반적인 포로수용소 배경의 영화와 유사한 결말로 끝을 맺으면서도, 다른 영화에서는 맛볼 수 없는 비수 같이 날카로운 해피엔딩을 끌어내는 수법의 비범함이 그것이다.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에서 빌리 와일더가 선택한 것은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거나, 나치를 단죄하거나 연합군의 사기를 북돋우며 승리를 기원하는 계몽적 스펙터클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전쟁의 중심에서 비켜난 곳에 존재하는 640명의 포로들의 환경과 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기상천외한 일들을 유머러스한 대사와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유쾌하게 그려내는데 주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빌리 와일더의 시선은 단순한 사건의 나열과 탈주드라마에 머물지 않고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즉, 철저하게 개인의 안위를 지향했던 세프턴을 자본주의의 알레고리로 사용하면서 그의 이기적 행위가 궁극적으로 이타적이 되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전쟁과 포로수용소라는 시공간적 무게감을 극복하기 위해 곳곳에 배치된 풍자극적 장치를 통해 하나씩 상정되기 이른다. 훗날 트뤼포는 이 영화를 “와일더의 최고 걸작 영화”라고 치켜 올렸으며, 영화 별점평가를 만든 레너드 말틴은 “이 영화가 전쟁포로를 그린 모든 영화의 Granddaddy”라며 별 넷 만점을 준 것으로 유명하다. 이제부터 빌리 와일더의 한층 노련해진 작법과 유머와 풍자가 가미된 빼어난 전쟁영화의 걸작 <제 17 포로수용소>를 본격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알레고리 : 미국식 자본주의

영화는 1944년의 크리스마스를 열흘 앞둔 어느 날, 다뉴브 강 근처의 제 17 포로수용소에서 벌어진 탈주사건으로 시작되며, 이때부터의 모든 이야기는 2년 반을 그곳에서 보냈던 ‘쿠키’라는 미공군중사의 회고담형식으로 진행된다. ‘일 년 중 가장 탈출하기 좋은 날’ 밤 막사를 빠져나갔던 맨프레드와 존슨이 독일초병에게 발각되어 사살당한 후 4호 막사에는 어두운 분위기가 감지된다. 그들은 내부에 스파이가 있다고 여기지만 증거가 없어 전전긍긍하던 중 가장 야비하고 눈엣가시인 세프턴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게 된다.

1차 세계대전이 선발제국주의와 후발제국주의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었던데 반해 2차 대전은 자유 민주진영과 파시즘 간에 벌어진 전쟁이었다. 두 차례의 대전을 통해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우월적 지위를 획득했고 자유진영의 수호자를 자임하게 되는데, 원조와 복구라는 명분을 등에 업은 미국적 삶과 미국식 자본주의가 유럽사회에 무혈 입성하는 것도 이 시기이다. 그러므로 세프턴이라는 이기적인간의 상업 활동을 빌려 자본주의에 대한 허와 실을 신랄하게 조롱하는 영화적 시선 즉, 4호 막사를 자본주의 사회의 알레고리로 사용하는데서 비롯된 와일더의 비판은 곧 전승국이자 자유진영의 대표주자로 자리한 미국식 자본주의를 겨냥한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쿠키의 회상대로 ‘잊을 수 없는 인물’로 손색없는 세프턴은, 획득과 교환을 통해 이기적 인간의 전형을 보이는 인물이지만 수용소 내 최고의 수완가이며 장사꾼이기도 하다. 그는 수시로 내기를 걸어 담배를 획득하고, 사설 경마를 개설해 마권을 팔기도 하며 증류기로 질 낮은 술을 만들어 사설 바를 운영하거나 망원경을 설치해 러시아수용소의 여자들을 관람하는 대가로 담배를 받는 등 갖은 방법으로 개인물품을 끌어 모은다. 이렇게 취득한 담배와 구호품을 독일병사에게 주고 필요한 것으로 교환하는 방식을 통해 사업에 필요한 물건을 손에 넣는 그의 모습에서 철저한 자본주의자의 전형을 보게 되는데, “적십자 구호품을 가로챌 궁리만 한다”는 막사반장의 비난도 무리가 아닐 정도다. 하지만 미국식 자본주의에 대한 와일더의 시니컬함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세프턴의 행위가 동료들의 미움을 산 후 막사 내 스파이로 지목될 때까지 밀어붙인다. 이를테면 맨드레드와 존슨의 탈출 실패, 탈출구의 위치, 라디오 은닉장소 발각 등, 막사 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행위를 독일 측이 알고 있는 것은 세프턴이 특혜의 대가로 독일 측 스파이 노릇을 해왔을 것이라는 추측을 부르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막사 내에서 자본주의에 물든 것은 비단 세프턴 뿐만이 아니었다. 영화의 화자이며 그의 수하인 쿠키는 물론이고, 세프턴을 멸시하면서도 그가 만들어놓은 자본주의적 발상에 열광하고 일희일비하는 나머지 포로들 역시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인간라는 점이다. 따라서 세프턴의 주력사업이 양조(술)와 망원경(여자) 경마(노름)라는 설정은 자본주의와 사유재산의 병폐를 바라보는 빌리 와일더의 명백한 시각을 상징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샤피로에게 배달된 5통의 편지 모두가 (당사자는 전쟁에 참가해 포로가 되어있는데) 자동차회사에서 보낸 할부금 독촉장과 압류통지서라는 점은 아연실색할 지경이지만, 이에 머물지 않고 예기치 않은 반전을 통해 막판까지 미국적 가치관을 뒤집는다는 점에서 와일더의 탁월한 능력은 증명된다. 즉 감독의 의해 내러티브상 우월적 지위를 획득하고는 내기마다 이기며 갖가지 물건을 소유함으로써 다른 이들의 멸시와 의심의 대상이었던 세프턴이, 바로 그 비열한 인물이! 스파이를 찾아내고 던바 대위도 탈출시킨다는 점이 그것이다. 모두가 실패한 일에 유일하게 성공하는 그가 동료들에게 “길모퉁이에서 보더라도 서로 아는 척 하지 말자”는 말을 던짐으로써 막사를 빠져나가는 마지막까지도 냉소주의자의 면모를 유지하는 것은 얼마나 멋진가. 결국 영화 속 세프턴과 동료들 사이에는 어떠한 동족애나 동료애가 스며있지 않으며 때문에 막판에 이르러도 그들을 서로 화해하지 않는다.


아이러니 : 이기적이거나 혹은 이타적이거나

하지만 한 가지 되짚어야 할 것은, 그의 야비한 분투 즉, 지독한 이기주의자의 모습으로 냉소적 언사를 퍼붓는 세프턴의 행위가 수용소 내 필요악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모든 포로들이 그를 비난하면서도 한 편으로 부러워하는 것은 자본가를 바라보는 노동계급의 시선과 궤를 같이 한다. 만약 그의 상업적, 이기적 행위가 없었더라면 술을 마시거나, 러시아 여자들을 망원경으로 훔쳐보거나, 경마를 하며 주말저녁 한 때 나마 즐거울 수 있었을까? 때문에 초조와 불안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포로수용소에서의 세프턴의 존재는 동료의 구호품을 앗아가는 수탈자로 인식되기에 앞서, 지루한 생활에 활력소를 불러오는 유희와 오락의 제공자로서 더 큰 위력을 발휘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의 이기적 행위를 무조건 멸시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앞서 언급한대로 막사 내 스파이를 찾아내는 것도 던바 대위와 탈출에 성공하는 것도 모두 세프턴이라는 점은 그의 이전 행위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결말이지만, 이로써 빌리 와일더의 의도는 명백해진다. 즉, 이기주의가 이뤄낸 이타적 행위의 웃지 못 할 아이러니에 대한 거대한 은유. 거칠게 말하면 (과정과 명분이 어떠했던 간에) 전승국, 특히 미국이 모든 것을 차지하는 The Winner Takes It All에 대한 얼음장처럼 차가운 끄덕임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는 후반부에서 보여 진 세프턴의 행위가 숭고한 의미의 자유를 얻고자 한 것이 아니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논증 가능한데, 이를테면 그가 스파이를 색출한 것은 자신의 누명을 벗으려는 목적일 뿐, 미국을 위한 군인의 사명감에서 발로된 행위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스파이를 찾아내거나, 혹은 동료들에게 맞아 죽거나 일터이다. 그러므로 그의 스파이 색출이 여전히 이기적 행동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시작이 삶에 대한 애착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며, 그가 던바 대위의 탈출을 돕는데 자원하는 것 역시 자신을 스파이로 몰았던 이들로부터 자유롭고 싶었을 것이라는 점은 감안한다면 이 또한 이기적사고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영광과 자유세계의 수호 따위에는 관심도 없이 오로지 “있는 동안 편하게 지낼 수 만 있다면 독일군과 어떤 거래도 불사하겠다”는 세프턴의 이기주의와 자유로운 사고가 장교를 구하고 스스로를 구하며 수용소내의 불신과 불안요소를 제거했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영화의 마지막은 세프턴과 던바 대위의 탈출 이후 행적이 아닌,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하나 둘씩 침상으로 오르던 포로들 모습과 정적을 뚫고 들려오는 휘파람 소리로 끝을 맺는다. (던바와 세프턴의 탈출이 전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관심조차 없어 보이는 와일더의 세계를 도대체 어떻게 해독해야 할까.)


빌리 와일더식 풍자의 수사학

<제 17 포로수용소>에서의 빌리 와일더식 농담과 코미디에 동조할 수밖에 없는 것은, 영화 속 에피소드들이 처절한 현실에 대한 역설적 풍자극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거장이라 이름 붙은 이들의 영화가 흔히 그러하듯 와일더의 영화에는 일반적인 장르 영화들이 넘볼 수 없는 특별함이 있다. 여기서 특별함이란 독일군 대 미군 포로들 간의 대립이 아닌, 포로와 포로들 사이의 대립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이다. 즉 영화는 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향한 눈물겨운 탈옥기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벌여야만 하는 야비한 분투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전쟁영화에서의 미군은 영웅적 행위를 통해 자유의 수호자로 그려진 반면 독일군은 히틀러의 광기에 사로잡힌 무자비하고 악랄한 파시즘의 추종자 형상을 띄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제 17 포로수용소>에서는 이러한 등식이 모조리 뒤집히는데, 암울할 수밖에 없는 포로수용소의 일상을 소동극으로 둔갑시키고 희화화 하는 역설적 시퀀스들이 그러하다. 예를 들어, 4호 막사 담당 슐츠가 아침마다 포로들을 깨우는 장면을 보면 이들 사이에는 오가는 농담과 가시 돋친 조롱이 위험수위를 넘나듦에도 불구하고 유쾌하기만 하다. 잡힌 자와 사로잡은 자의 구분이 모호하고 미군과 독일군의 위치가 불분명할 정도로 혼란 속에서 수용소의 하루가 시작되는데, 이들의 일상자체가 한편의 코미디에 가까울 정도다. 이는 수용소의 현실과는 전혀 무관한 유머러스한 설정을 통해 전쟁에 동원된 자들의 혼란스런 가치관을 드러내려는 의도에 다름 아닐 것이다. 수용소 사령관은 포로들의 탈출로 인해 자신의 업적이 훼손될까봐 전전긍긍할 따름이고, 막사 담당 슐츠는 사령관과 스파이 사이의 연락을 맡고 있지만, 한 때 미국에서 레슬링선수로 활동했던 전력을 자랑하며 포로들을 인간적으로 대해주는 인물로 그려진다. 또한 포로에게 총까지 맡긴 채 배구공을 던지며 즐거워하는 독일병사의 모습은 차라리 안쓰러워 보일 정도다. 감독의 이런 희극적 재능은 영화의 몇몇 캐릭터 때문에 더욱더 빛이 나는데, 영화에서 애니멀과 샤피로를 연기하는 콤비(브로드웨이 뮤지컬 공연 당시에도 같은 역을 맡았던) 로버트 스트라우스와 하비 렘베크의 경우 그들이 벌이는 러시아 여자 포로 목욕탕 전진 사건이나, 샤피로가 베티 그레이블을 잊지 못하는 애니멀을 위해 가발을 쓰고 흉내를 내면서 위로하는 장면들은 (광대라는 별칭에 맞게)영화 전반에 걸쳐 흥겨움을 선사하는 견인차가 되고 있다. (그들의 모습은 와일더의 1959년작 <뜨거운 것이 좋아>에서의 잭 레먼과 토니 커티스를 떠올리게 만든다) 또한 독일군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나의 투쟁》이라는 지침서를 학습한다는 이유로 모든 포로들이 히틀러 흉내를 내며 콧수염을 달고 딱딱한 독일군 영어 악센트를 선보이면서 막사에 들어오는 슐츠를 맞이하는 모습은, 즐겁기도 하지만 동시에 서글픔을 머금게 만드는 장면이기도 하다. 덧붙여 전쟁 전 배우였다는 인물을 등장시켜 개리 그랜트나 클라크 케이블의 멋진 대사까지 곁들여가며 지적인 풍자를 만들어내더니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When Johnny Come Marchin' Home’라는 익숙한 멜로디의 군가를 부르고 춤까지 추는 장면은 빌리 와일더가 장르의 명장임을 확인시켜주는 대목이다.



빌리 와일더는 동시대에 활동했던 그 누구보다 훌륭한 영화들을 많이 만든 장인이었고, <제17 포로수용소>는 그의 화려한 필모그래피에 주렁주렁 달려있는 풍성하고 달콤한 열매 중 하나이다. 50년이 넘은 지금보아도 낡거나 진부하지 않은 이야기와 필요한 것만 취사선택하는 간결함과 멋 부리지 않고 기본에 충실한 카메라 워크까지. 그러니 보다 밝은 채색으로써 빌리 와일더의 세계의 새로운 막을 활짝 열어 제친 이 작품을 어찌 마다할 수 있을까! 해묵은 이야기고 거장의 작품을 볼 때 마다 느끼는 바지만, 현재 한국영화 중에서 50년 뒤에도 살아남아 관객을 흥분시킬 작품이 몇이나 될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던지는 고언(苦言), ‘정말로... 하고 싶은 것에 집착하지 말고 할 줄 아는 것을 해야 한다’는 것. 빌리 와일더가 그것을 온몸으로 증명해주지 않았던가.

2006.12.24
백건영(영화평론가)
편집장

by 달의궁전 | 2007/10/09 10:25 | 네오이마주 | 트랙백 | 덧글(0)

빌리 와일더와 할리우드 (3) [잃어버린 주말]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미국은 비록 승리했지만 엄청난 정치적 경제적 후유증에 시달리게 된다. 수많은 물자와 인명을 유럽과 아시아의 양편에서 쏟아 부우면서 결국 미국이 손아귀에 움켜쥔 것은 전리품의 황금이 아니라 불타버린 잔해의 찌꺼기들이었기 때문이다. 나치 독일은 시가전과 공습으로 잿더미가 돼버린 지 오래였고 일본은 오랜 전시체제하의 배급경제로 극도의 내핍생활을 해야 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미국에는 전쟁이 끝난 후 귀환병들이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기업도 타격을 받은 상태였다. 전시 물자를 대느라 정부와 군사제품 수의계약을 맺었던 소수의 대기업은 살아남았지만 대부분 다른 기업들은 민간 소비가 억제되는 전시 경제 구조 하에서 자연도산 해버린 상태였다. 결국 2차 대전이 끝났어도 미국은 모두가 가난한 상태였고 노동자들의 임금이 오를 수 없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집에서 먹고 마실 설탕이나 커피도 귀했으며 전자 석유 화학제품 같은 생필품도 귀했지만 그런 물건을 만들 공장도 없었고 귀환병들에게 돌아갈 일자리조차 되지 않은 상태였다.


들어가며

알코올 중독자를 그린 영화를 꼽자면 마이크 피기스 감독의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나 베티 토마스 감독의 <28일 동안>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알코올 중독자의 피폐한 내면과 처참한 자기투쟁 과정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작품으로 빌리 와일더가 연출하고 레이 밀랜드가 열연한 <잃어버린 주말>에 비길 만 한 영화는 다시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또한 이후 만들어진 알코올 중독자의 삶이 나오는 모든 영화들은 이 영화에 얼마간의 빚을 지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잃어버린 주말>은 알코올 중독 영화에 관한 전범(典範)으로 자리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1945년의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인 빌리 와일더의 〈잃어버린 주말 The Lost Weekend>은 알코올 중독 문제를 부각시킴으로써 ‘의미 있는’ 주제를 좋아하는 아카데미의 입맛을 맞추기도 했지만, 이 영화에서 드러나는 전쟁 후의 우울한 분위기는 이 시대 사람들만이 공감할 수 있는 독특한 것이기도 했다. (이 작품은 1946년 열린 제 1회 칸 영화제에서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무방비 도시>와 더불어 그랑프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 영화에 대한 미국내 분위기가 우호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주류협회는 이 영화를 사장시키기 위해 파라마운트사에 500만 달러를 제시한 반면, 금주단체들은 이 영화가 오히려 음주를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를 나타내며 항의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당시로는 드문 상업적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성공한 작품이 <잃어버린 주말>이다.
  

Opening_ 황홀하고 완벽한 원의 세계 속으로

영화가 시작되면 뉴욕 3번가에 위치한 공동주택의 창문이 보이고 외벽에 매달린 술병과 함께 주인공 ‘돈 버냄’이 등장하는데, 그는 동생인 ‘윅’과 아버지의 농장에서 주말을 보내기 위해 짐을 꾸리는 중이다. 지독한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연인 ‘헬렌’과 동생에게 불신만 안겨주며 무위도식하는 그에게 주말 농장에서의 며칠간이 지옥 같을 게 빤한 것은 도무지 술을 마실 수 도 없고, 무능력한 패배자인 자신을 알아보는 이들의 눈초리를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동생과 헬렌이 연주회에 간 후 그는 파출부에게 줄 10달러를 손에 쥐고서 단골 술집 ‘넷의 바 (Nat's Bar)’로 향하게 된다. 이때부터 영화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술에 의존한 채 살아가는 알코올 중독자의 처절한 자기투쟁의 기록을 지독할 정도로 사실성 넘치게 묘사하며 동시대인들을 위무하고 계몽하게 된다.

<잃어버린 주말>은 빌리 와일더의 40년대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한정된 공간에서 단조로운 동선으로도 충분히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음을 증명해준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의 공간이라고는 돈의 집과 넷의 바를 오가는 반복이 이어질 뿐이며 그 밖의 장소라고 해봐야 오페라 하우스와 병원 장면이 고작일 정도로 극단적으로 짧은 동선에 의존하면서 주인공의 행동반경을 제약하게 된다. 그러니 이 궤적에 놓인 주인공에게 강박증과 금주에 따른 금단현상이 극심해질 것은 빤할 일일 터이다. 또한 이 영화는 대형 스튜디오의 지원이 없었기에 소규모 제작비로 만들어졌으며, 때문에 배우의 연기와 감독의 연출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극복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것은 1990년대 뉴욕 인디펜던트무비 붐의 효시로 볼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이중 배상>에서의 필름느와르 스타일과 거리를 두며 <선셋 대로>에서 보여준 할리우드의 자기반영적 요소도 찾아볼 수 없지만, 단출한 시공간을 활용하며 일상의 단면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와일더의 기품이 배어있다는 점에서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고 하겠다. 따라서 <잃어버린 주말>에서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배우가 공간을 지배하는 방식과 더불어 인물들의 관계망에서 읽혀지는 당대 미국사회의 병리적 현상이다.


와일더식 공간지배와 분할

영화의 주인공 돈은 코넬 대학 재학 중 학회지를 만들며 두각을 나타낸 타고난 작가이다. 자신의 천재적 능력을 과신하여 대학을 중퇴한 후 몇 편의 소설에서 성공을 맛보았지만 이내 좌절하고 글쓰기를 포기한 인물이다. 그가 애인 헬렌을 처음 만나는 곳은 ‘라 트라비아타’가 공연되는 어느 오페라극장이다. 이후 헬렌의 부모를 만나기로 한 돈은 약속을 어기고 도망치다시피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처지가 볼품없고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것 때문이다. 영화를 통틀어 유일하게 플래시백으로 구성된 두 개의 시퀀스는, 동생이 고향집으로 떠난 다음 날 넷의 바에서 진술하는 내용이며 자신이 구상중인 소설 《술병(Bottle)》의 스토리의 일부이기도 하다. 즉 자전적 소설을 술집 주인에게 들려주는 가운데 영화는 집과 넷의 바를 오가는 돈의 모습을 통해 현실과 허구 사이에서 허우적대는 알코올 중독자의 모습을 가감 없이 그려내게 된다. 그러므로 3일의 시간을 관통하는 알코올 중독자의 처절한 투쟁기가 공간의 상징성을 각기 달리할 때, 관객은 때론 윅과 헬렌의 시선으로 때론 넷과 글로리아의 시선으로 돈의 현실을 관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와일더는 두 개의 공간을 현실과 상상의 장소로 구분하고, 공간을 지배하는 인물들 역시 같은 방식으로 나누어 놓으면서 대립각을 형성시킨다. 하지만 이러한 대립의 이미지는 상반된 의미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즉 양자의 상호보완이 가능하며 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는 장치로 엮어놓고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 보여 지는 두 개의 대표적 공간은 돈의 집과 넷의 바다. 공식적으로 술을 마실 수 없는 돈의 집은 현실의 장소이며 돈만 주면 술을 마실 수 있는 넷의 바는 환상의 장소로 볼 수 있다. 집에 속한 인물인 동생 윅과 헬렌은 돈의 알코올중독에 지쳤음에도 여전히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 주는 이들이고, 넷의 바에서 만나는 주인 넷과 여급 글로리아는 그의 단점을 알면서도 포용하거나 따끔한 비판도 서슴지 않은 인물들이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가족이라 할 수 있는 윅과 헬렌을 자신을 구속하고 훈계하는 귀찮은 존재로 여기는 반면 넷과 글로리아는 술과 함께 할 수 있는 보다 친근하고 이상적인 유사가족의 이미지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또한 엄격하고 합리주의자의 면모를 지닌 동생 윅보다 투덜대면서도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주는 넷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도 이런 이유이다. 마찬가지로 상류층이며 정숙미를 갖춘 헬렌보다 비천하지만 살갑게 다가오는 여급 글로리아에게 친절한 눈빛을 보내는 행위 역시 일견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알코올중독자가 금단현상을 이기지 못해 뛰어 들어간 공간 속에 술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이지만, 영화에서 돈은 단순히 술에 대한 욕구뿐 아니라 현실에 대한 압박감에서 해방되기 위해 또는 금주에 대한 강박증을 이겨내려는 목적으로 넷의 바를 찾는 다는 점이다.


전후 미국사회의 우울증

1921년 현진건의 소설 《술 권하는 사회》의 주인공인 남편은 자신에게 술을 권하는 것은 화증도 하이칼라도 아니고 현 조선사회라고 말한다. 남편은 조선의 현실을 비판하며 그런 사회에서 자신이 할 일이란 주정꾼 노릇밖에는 할 일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내가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자 무지에 답답해하며 집을 나가버리고, 아내는 절망한 어조로 중얼 거린다.
“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

마찬가지로 엄격히 말하자면 글쓰기를 포기한 돈이 동생 윅에게 얹혀살면서부터, 동생이 주는 담배 값 55센트를 받는 상황이 불러온 강박증이 그에게 끊임없이 술 마시도록 권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믿음이 유일한 방법”이라 믿는 헬렌의 극진한 애정과 “6년 동안 할 만큼 다 했다”고 푸념하는 동생 윅에 대한 과도한 강박관념이 빚어낸 비극적 일상은 죽기 전에는 멈출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어 나를 술 마시게 한다” “두 명의 돈이 있는데, 술 마시는 돈과 글 쓰는 돈”이라는 항변이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당대 미국사회의 단면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주인공에게서 삶에 대한 어떠한 희망도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은 비단 그가 알코올에 찌들었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치솟는 물가와 실업자가 가중되던 당대 미국의 사회상을 감안한다면 넷의 바에 모여들어 대낮부터 술을 마시는 남자들의 모습과 돈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돈은 그들 보다 더 많이 더 자주 마실 따름이고 스스로 고백하듯이 “술을 마시면 안 되고, 멈출 수 도 없는” 사람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렇게 빌리 와일더는 할리우드의 장르 속성에 걸맞지 않는 파격적인 이야기를 소재로 화려한 도시 뉴욕의 그늘을 보여줌으로써 전후 미국사회 속에서 소멸직전에 놓인 개인의 사생활을 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와일더가 선택한 것은 인물이 공간을 지배할 때 발생하는 화학작용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서민들의 허름한 공간인 넷의 바에서 술을 마실 때의 돈이,  (스스로 셈을 치룰 수 있는)공간과 어울리는 인물이라면, 고급술집인 '해리 앤 조'에서의 돈은 숙녀의 백을 훔치다가 쫓겨나는 이방인일 뿐인데, 그곳은 돈이 머물러서는 안 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헬렌을 만나는 시점에서 오페라 관람을 할 정도의 정신적으로 풍요로웠던 그가 알코올 중독자가 된 후 물질과 정신이 피폐해지면서 하층민의 삶으로 전락하고 있음을 공간적 대비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돈이 마시는 술은 곧 그의 비루한 현실에 대한 상징성을 지닌다. 가정부에게 줘야 할 10달러를 들고 주류상을 찾은 돈은 라이(Rye) 2병을 사면서 “늘 사가던 것을 주시오. 12년 산 그런 것 필요 없소!”라고 말한다. ‘라이’란 카나디안 블랜디드 위스키의 일종으로 호밀(Rye)을 4년간 숙성시켜 만드는 술인데, 20세기 들어서는 미국에서 시행된 금주령을 계기로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고 금주령이 해제된 이후 도시 하층민들이 즐겨 마시는 가장 싼 술 중 하나이다. 돈이 넷에 바에서 마시는 술 역시 라이이고 보면 그의 삶의 현재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반유태주의의 그늘

2차 세계대전 직전, 대서양을 넘나들며 미국과 유럽을 연결했던 미국의 거대한 상선회사가‘세계는 작다, 오직 미국만이 크다’라는 광고 문구를 사용했던 적이 있었다. 이는 오히려 ‘세계화’로 표현되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에 보다 더 적합한 내용일 수도 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지금까지 보여준 사회상은 특히 유럽의 정신사 속에서 항상 긍정과 부정, 그리고 애증(愛憎)을 기록해 왔으며 지금도 이는 마찬가지다. 이 영화가 만들어지던 1945년 당시의 미국은 두 번의 세계대전을 통해 세계의 중심으로 우뚝 선 국제사회에서의 위치와는 별개로, 내부적으로는 각종 사회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으니 즉, 개인의 자유의 제한과 반유태주의의 확산은 다원주의 그리고 관용을 기초로 한 미국의 민주주의 장래에 비관적인 전망을 낳고 있었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서, 해리 앤 조의 바에서 쫓겨난 돈은 기어이 타자기를 팔기위해(술을 사기 위해) 뉴욕 3번가를 헤매게 되는데, 이날이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욤 키퍼(속죄의 날 Yom Kippur)라서 전당포가 문을 연 곳이 한 곳도 없음을 알고는 넷의 바에서 술을 구걸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렇듯 먼지 날리는 뉴욕 3번가를 헤매는 돈의 발걸음을 좇다가 그가 좌절하는 장면에 이르면 관객은 끔찍한 표정과 마주하는데, 그것은 마치 지옥 앞에선 자의 표정에 다름 아니다.

1920년대 대공황을 기점으로 이전까지 미국사회를 장악했던 WASP (White-Anglo-Saxon-Protestant)는 그 세력이 점차로 약해진 반면 유태인들과 아일랜드계의 득세는 경제와 정치참여의 형태로 결실을 맺어가고 있었다. 특히 2차 대전을 기회로 연합국에 막대한 경제지원을 아끼지 않은 유태인들이 반대급부로 시오니즘의 실현(1948년 이스라엘 건국)을 얻어낸 것은 중세이후 유태인들이 상업분야에 전념하며 갖은 수모를 감수한 것에 대한 결실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잃어버린 주말> 속에 전후 미국사회에 만연했던 반유태주의에 대한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담겨있는 점은 특별할 것이 못된다. 당시 뉴욕 중심의 거의 모든 전당포는 유대인과 아일랜드 인들이 독점하고 있었으며, 유대인이 욤 키퍼에 휴무를 하는 조건으로 아일랜드 인들도 성 패트릭(St. Patrick)축제일에 문을 닫는 협정을 맺었다. 종전 직후 서민들의 생활고가 극심해졌음을 감안할 때 전당포가 성업이었을 것은 불을 보듯 빤한 일이고, 영화에 나오는 길가에 즐비한 전당포와 장의사가 이를 대변해주고 있다. (영화를 보면 12시 30분 정도에 출발한 돈이 오후 4시가 되어서야 다시 넷의 바로 돌아가는데, 뉴욕의 거의 끝까지 전당포가 곳곳에 있음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Ending_ 나락에 떨어진 자의 얼굴로 자신을 구하다

영화의 끝에 이르면 자실 대신 금주를 선언한 돈의 의미심장한 독백 “그날, 내가 가방을 쌀 때, 가방을 싸는 것이나 주말휴가에는 관심도 없었어. 내 셔츠를 가방에 넣는 것도 말이야. 내 마음은 오로지 창밖에 매달려 있었지. 18인치 정도로 밖에 매달려 있었던 거야. 그리고 그 밖에는 엄청나게 크고 넓은 세상”에 걸맞은 청명한 뉴욕의 하늘이 인상적으로 보여 지는데, 이로써 알코올 중독자 돈의 비참한 주말을 빌려 인간의 삶을 관통하는 자기투쟁의 역사를 정확하게 포착해낸 <잃어버린 주말>은 희망적 미래를 암시하며 끝을 맺는다.
  
이렇듯 무기력한 한 남자를 알코올 중독이 불러올 수 있는 모든 상황 속에 집어넣고는(술을 숨기고-자기 물건을 팔고-물건을 훔치고-자살을 시도하는 순차적 몰락) 어떠한 자비심도 없이 관객에게 끔찍한 경험을 안겨주는 이 영화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 각자의 몫이지만, 분명한 것은 그 결말이 명백한 해피엔딩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찌 보면 헤이스 코드(Hays Code : 1930년대에 만들어진 영화제작윤리강령)에 따른 자기검열의 결과라 할 수 있겠으나 역설적으로는 이를 비웃는 장면이 곳곳에 드러난다는 점에서, 빌리 와일더가 할리우드 제작자들의 충복이 아니었음을 반증하고 있기도 하다.  

빌리 와일더에 따르면 “영화의 80%는 각본으로 결정된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각본가 출신 감독다운 언급이라 하겠고, 이 말에 동의하느냐 마느냐는 와일더의 영화를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에 따라 나뉠 테지만 적어도 코미디에 관해서는 각본이 모든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반면에 <잃어버린 주말>에서 보여준 빌리 와일더의 역량은 각본보다는 무명 배우를 완전히 캐릭터에 녹아들도록 조련한 데 있다고 하겠다. 즉 돈 버냄 역의 레이 밀랜드는 중독자의 내면성에서 마치 자기 자신을 드러낸 좌절과, 미국의 현실 변화의 방식을 고발해 보임으로써 이 영화로 아카데미와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동시에 석권하는 성취를 이뤘으며 <다이얼 M을 돌려라 (1954)>에서도 명연기로 갈채를 받기도 했다. (알코올 중독자 연기의 밀도감에 있어서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니콜라스 케이지마저 한참 모자랄 정도이다.) 달리 보면 빌리 와일더는 만년 2류 배우였던 무명의 레이 밀랜드를 구원했고 밀랜드는 <잃어버린 주말>을 구원한 셈이다. 이는 바로 전해 만들어진 <이중 배상>으로 스타덤에 오른 프레드 맥머레이의 경우와 흡사한 경우이며, 와일더의 역량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덧붙여, 영화 전반에 걸쳐 원맨쇼에 가까운 열연 퍼레이드를 펼치는 레이 밀랜드의 연기는 물론이지만, 와일더의 연출이 빛을 발하는 몇몇 장면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처음 넷의 바에서 감개무량한 마음으로 술잔을 받으면서도 “좀 더 서둘러줄 수는 없겠나?”라며 독촉할 때의 안타까운 표정을 포착한 쇼트와 술의 필요성을 설파하는 돈의 표정을 잡은 넷의 시점 쇼트, 그리고 뉴욕 3번가를 방황하는 시퀀스에서 모멸감이라고는 한줌도 남지 않은 사내의 술을 향한 집념어린 표정이 이내 좌절감으로 바뀔 때, 몸이 무너져 내리는 쇼트 등인데, 배우의 연기에 섬세함을 가미시킴으로서 극한의 진정성을 이뤄낸 이들 장면은 두고두고 잊기 힘들 듯 하다.


나가면서_ 끝장을 봐야 안심하는 남자

“그래도 못 알아듣네. 참, 사람 기막혀.
본정신 가지고는 피를 토하고 죽든지.
물에 빠져 죽든지 하지. 하루라도 살 수가 없단 말이야.” 《술 권하는 사회》

현진건의 소설이 나온 지 80여년이 흐른 지금. 한국은 또다시 ‘술 권하는 사회’가 되고 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기업구조조정으로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고 대학을 졸업하고도 갈 곳이 없는 청년실업자가 큰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일당 2만원에 생계를 걱정하는 계약직 종사자, 한 달 100만원도 넘지 않는 수입에 한숨을 토하는 택시 운전사, 카드빚에 쫓겨 유흥업소에 나온 10대들, 여기에 경제 살리기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밥그릇 싸움만 하는 정치인들까지. 밥 대신 술을 먹어도 시원치 않을 세상이다. 60년 전 영화 속 돈이 그랬듯이 세상의 모든 이들이 자신을 멸시한다는 자괴감에 사로잡혀 삶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살아갈 날이 많이 남았거나, 이미 경험한 것이 너무 많은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알코올 중독자를 극적으로 건져 올린 이야기는 영화에만 해당하지 않을 것이다. 현실에서 비껴난 소재를 통해 현실과 끊임없이 교접하려는 빌리 와일더의 시도가 의미 있는 성취를 얻어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빌리 와일더는 초기 걸작 3편 즉, <이중 배상> <잃어버린 주말> <선셋 대로>을 통해 궁지에 몰린 인물들로 하여금 도덕적 가치판단보다는 현실적 선택을 유도함으로써 개인과 개인을 둘러싼 사회구성원 모두를 문제 삼는다. 그리고 와일더의 인물들은 브레이크가 파열된 자동차처럼 끝을 볼 때 까지 달려가야 한다. 경제적 안정이 필요했던 조 길리스가 수영장 위에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때 까지(<선셋 대로>), 여인의 순수한 애정을 믿었던 네프가 그녀의 배신에 치를 떨며 총탄을 받아들일 때 까지(<이중 배상>) 그리고 알코올 중독자 돈이 지옥을 볼 때 까지(<잃어버린 주말>) 그러니 빌리 와일더야 말로 끝장을 보아야 안심하는 남자가 아닐까?



(추신) 빌리 와일더의 초기 세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다음은 앞서 언급한대로 이전보다 교묘하게 웃음으로 포장하면서도 신랄한 비판을 담아 탁월한 영상미를 보여준 <제 17 포로수용소>이다. 당초 빌리 와일더 시리즈는 <제 17 포로수용소>에서 끝마치려 했으나, 이왕 시작한 것 나도 끝을 봐야겠다는 마음으로 라인업을 늘릴 생각이다. 아마도 코미디시대까지 접근할듯한데, <뜨거운 것이 좋아> <7년만의 외출>을 마릴린 먼로 시리즈로 묶고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와 <키스 미 스투피드>에서 마무리 할 생각이지만, <빅 카니발>과 <정부>는 여건이 허락된다면 꼭 다뤄보고 싶은 작품이다.  

2006.12.18
백건영(영화평론가)
편집장

by 달의궁전 | 2007/10/09 10:24 | 네오이마주 | 트랙백 | 덧글(0)

빌리 와일더와 할리우드 (2) [이중 배상]

연합군이 프랑스의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함으로써 2차 대전의 운명을 바꾸며 종전을 향해 치닫던 1944년은 할리우드에서 느와르의 걸작들이 대거 탄생한 해이다. 할리우드 시스템 내에서 자기경멸적인 전복의 서사를 다룬 빈센트 미넬리의 [세인트루이스에서 만나요]로 포문을 연 느와르물의 붐은 오토 프레민저의 [로라]를 거쳐 조지 큐커와 잉그리드 버그만이 만난 [가스등]에 이른 후, 레이먼드 챈들러의 손길이 닿은 두 편의 영화, 에드워드 프레드릭의 [안녕 내 사랑]과 빌리 와일더의 [이중 배상]에서 정점을 찍게 된다. 다른 분위기를 띤 알프레드 히치콕의 [구명보트]가 만들어진 것도 이 해이다. 이러한 느와르의 강세 속에서도 아카데미에서는 사제로 출연한 빙 크로즈비가 거리 아이들의 생활을 개선시키는 감상적인 이야기 [나의 길을 가련다]가 상을 휩쓸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 한 하다.


시작하면서
빌리 와일더의 네 번째 연출작이며 1944년 아카데미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된 <이중 배상>은 1920년대 미국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에 기초한 제임스 M 케인의 소설을 레이먼드 챈들러와의 공동시나리오 작업을 통해 완성된 작품이다. 이 사건을 간단하게 살펴보면, 러스 스나이더 Ruth Snyder라는 부인이 보험금을 노리고 자신의 정부 주드 그레이 Judd Gray와 합세하여 남편 알버트 스나이더 Albert Snyder를 살해하고 결국에는 사형당한 사건이었다. 요컨대 <이중 배상>은 필름느와르 계열의 작품이고 빌리 와일더가 만들었으며 ‘거짓말 서스펜스’를 차용해 진행됨과 동시에 느와르 최초로 팜므파탈이 등장하는 영화이기도 하다.(거짓말 서스펜스에 대한 설명은 뒤에서 할 것이다.) 영화의 제목인 <이중 배상_ Double Indemnity>의 뜻은 보험사에 사고보험을 들었을 경우 계약서에 기록된 특수 조항에 해당되는 사고가 나면 배상금의 2배까지 받을 수 있음을 의미하는데, 보험업계에서는 이중배상이라는 말 대신 배액지급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영화는 월터 네프라는 사내가 총을 맞은 채 자신의 사무실에 들어와 사건의 전모를 밝히고 살인자백을 하는 독특한 시퀀스로 시작된다. 이 시점으로부터 2개월 여전, 평범하고 흠 없는 서른다섯 살의 보험세일즈맨 네프는 디드릭슨이라는 기업가의 집을 찾게 된다. 두 대의 자동차 보험의 만기 연장을 위해 방문한 그를 맞이한 사람은 디드릭슨의 부인 필리스인데, 간호사였던 그녀는 디드릭슨의 전처를 간호하던 중 부인이 죽자 그와 결혼한 여자이다. 일에 쫓겨 자신에게 관심조차 두지 않는 남편을 원망하던 아내가 ‘남편이 없는 세상’을 꿈꾼다는 설정은 비단 느와르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보다 이상적인 남자도 취하고 돈도 얻고자하는 요부의 면모가 필리스에 얹혀 지면서 사건은 스릴러의 성격을 띠게 된다. 보험세일즈맨이라는 적합한 직업을 가진 사내가 나타나 자신에게 관심을 보일 때, 그를 이용한 보험범죄가 벌어지리라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을 터이다. 따라서 영화는 네프가 필리스의 꼬임에 빠져 범죄에 가담하고 임무를 완수하는 상황까지를 전반으로 하고, 이후 조여 오는 탐문조사망에 초조해하는 시간 동안 또 다른 음모의 실체를 알아가는 내용을 후반으로 진행된다.


빌리 와일더의 서사방식
필름느와르의 특정한 서사구조로서 플래시백과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의 사용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이중 배상>은 네프의 자기고백으로 시작하면서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기법을 통해 주인공의 심리상태는 물론이고 그간 겪어온 심적 갈등까지 고스란히 표현해내고 있다. 마찬가지로 오손 웰즈의 <상하이에서 온 여인 (1947)>이나 <선셋 대로 (1950)>의 경우 같은 양식을 취하고 있는 대표적 사례이다. 남자 주인공은 자신이 겪은 사건과 자신이 만난 팜므 파탈에 대해서 기억을 떠올리고 그 때 느꼈던 감정이나 사건의 추이를 1인칭 시점으로 내레이션 하는 데, 이것은 특정한 주인공에게 동일시의 관점을 부여하고 그가 겪은 사건의 충격과 심정의 변화를 한층 더 강하게 표현하는 양식으로 더 없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레이먼드 챈들러는 빈정거리며 작가의 사명을 말한다. “이곳은 유쾌한 세계는 아니다. 하지만 당신이 살고 있는 곳이다. 어쩌겠는가. 작가라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느와르는 이런 현실에서 느끼는 등장인물들의 불신과 혐오감을 스타일로 승화시킨다. 느와르의 조명과 화면은 폐쇄공포증과 편집증을 부추기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시각 스타일로 귀착되는 필름느와르는 유럽 표현주의에 상당한 빚을 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필름느와르가 이야기 틀을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 빌려왔다면 시각 스타일은 유럽 표현주의에 젖줄을 대고 있다.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독일인과 오스트리아인들은 1920년대 독일 표현주의의 유산을 가져왔다. 광포한 역사에 짓눌린 음산한 세계관과 더불어. 영화사가 들은 1929년 <일요일의 사람들>이란 초저예산 영화를 찍기 위해 베를린에 모였던 영화인들이 훗날 필름느와르의 주춧돌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프리츠 랑을 비롯한 유럽출신 감독들은 표현주의적 화면과 극단적인 어둠을 사용하는 조명기법을 할리우드에 도입했다. 그러나 느와르에 우아하고 어두운 눈의 날개를 달아준 이는 촬영감독 존 앨튼이었다. 그는 많은 중요한 필름느와르의 촬영을 맡았는데 혁신적인 조명기술로 할리우드에서 평판이 자자했다. "다른 촬영감독들은 노출에 맞춰 조명을 비춘다. 그러나 난 분위기를 위해 빛을 비춘다"고 앨튼은 말했다. 당시 그를 고용한 MGM의 제작자가 회고하는 바에 따르면 "앨튼은 마룻바닥에 비치는 빛만으로도 촬영을 할 수 있었고 시간을 많이 절약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촬영감독에게 인기가 없는 사람이었다." 이렇듯 1930년대 초 이래 유럽에서 전쟁을 피해 피신한 영화인들이 미국 영화계에 그들의 기술적인 전문 지식을 이식하기 시작하면서 미국 고유의 필름느와르는 이 해부터 싹트기 시작했으며, 그런 면에서 아카데미가 빌리 와일더의 신랄한 영화 <이중 배상>에 주목한 것은 의미가 깊다.



인물을 그려내는 방식에서의 와일더식 느와르의 특징은 (여성캐릭터를 조명하는 방식과 그림자와 연기를 통해 음울하고 비정한 공간을 만들어내는 식의 느와르적 특질에서 한 치 벗어남이 없지만) 대상 인물들을 희화적으로 그려내고는 그들에게 적절한 낭만주의적 기질을 부여함으로써 파렴치한에서 멀찌감치 물러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네프와 필리스가 만나 범죄를 모의하는 슈퍼마켓 장면에서 볼 수 있듯이 이들의 행동이란 유치하고 단순하기 짝이 없는데, 한 발짝의 거리차로 상대방의 시선과 귀를 피할 수 있다고 믿었던 그들의 단순함은 가장 가까운 공간에 자리한 키즈에 의해 폭로되기 이른다. 또한 감독은 예고 없는 키즈의 방문을 받고 당황하는 네프와 같은 시간 그의 집을 방문하지만 문 뒤에 숨어 두 남자의 대화를 듣는 필리스에게 죄의식을 선사함과 동시에 범죄자와 사건담당자를 한 공간에 모아놓음으로써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고 사건의 수준을(그들이 그토록 신중하고 힘들게 결행했던) 가볍게 전락시켜 버리는 영민함을 발휘하기도 한다.

다만 <이중 배상>에서 주목할 것은 대사의 힘을 극대화함으로써 배우들의 연기에 날개를 달아준 각본의 출중함이다. 여기에 영화성격에 따라 인물과 배우, 배우와 대사, 대사와 인물 간을 적절하게 조절하면서 최상의 조합을 통해 최고의 완성도를 이뤄낸 빌리 와일더의 뛰어난 연출력 또한 칭찬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이중 배상>의 주요배우들인 프레드 맥머레이와 바바라 스탠윅, 에드워드 G. 로빈슨 등의 연기가 나무랄 데 없음에도 그들의 모습만으로는 캐릭터와의 유사점을 찾을 수 없는 데 반해 그들이 입을 열어 대사를 시작하면 바로 네프가 되고 필리스가 되며 키즈가 되는 식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사랑에 노예가 되어 범죄에 가담하는 결코 매력적인 신사의 모습과 거리가 먼 맥머레이와 우스꽝스런 가발을 뒤집어쓰고 팜므 파탈을 연기하지만 오히려 가정부역할에 더 어울릴 법한 바바라 스탠윅은 물론이고 <리틀 시저>에서 열연을 펼쳤음에도 왠지 예민하고 냉철한 보험회사 배상담당보다는 코미디언에 어울릴 것 같은 왜소한 체구의 에드워드 G. 로빈슨을 캐스팅하여 레이먼드 챈들러의 각본을 통해 새로운 인물들로 거듭나게 만든 빌리 와일더의 능력은 가히 일품이라 하겠다. 반면 네프와 필리스의 만남과 사건의 진행을 보면 다소 억지스럽고 개연성이 떨어지는 부분도 눈에 띠는데, 이를테면 첫 방문에서 두 남녀가 교감하고 다음 번 만남에서 살인공모에 동의하는 동안 한 눈에 반한 연인들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으며, 동업자들의 우정확인 이상을 넘어서지 못하는 그들의 키스는 건조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중 배상>의 완성도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드물다. 이는 유럽에서 장인들과 작업을 하는 동안 빌리 와일더가 영화적으로는 느와르의 특질을 정확하게 꿰고 있었으며 미국역사의 한계성 또한 충분히 이해했다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느와르는 무엇보다 스타일이기 때문에 사회적 갈등을 논리가 아니라 시각 스타일로 풀어냈고 이를 통해서 느와르는 사회학적 문제들을 미학적 해답으로 창조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팜므 파탈에 대한 오해 또는 진실
<이중 배상>이 제기하는 또 다른 문제는 팜므 파탈 캐릭터를 통한 당대 여성들의 사회적 위치 확인이다. 제2차 세계대전당시 많은 남자들은 전쟁터로 갔고, 숱한 공장과 회사들은 여성들로 채워졌다. 전쟁이 끝난 후 돌아온 남자들에게 돌아갈 일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이는 1차 대전 이후 돌아온 영웅들이 갱이 되거나 무위도식 하며 사회의 골칫거리로 전락한 예와 같으며 월남전 이후 고향으로 돌아온 병사들의 무기력과 사회의 냉담함 속에 이중 상처를 겪는 것과 동일하다. (라울 월시의 <포효하는 20년대>나 윌리엄 와일러의 <우리 생애 최고의 해> 올리버 스톤의 <7월 4일 생>을 보라) 즉, 전쟁에서 승리하여 금의환향한 그들에게 남겨진 것이라곤 빛바랜 훈장뿐이었다. 일터는 여성으로 대치되어 남성의 위치를 위협하면서 가부장제에 역행하는 사회분위기를 자아내었다. 따라서 위협적인 여성으로 그려지는 팜므 파탈은 그런 시대 남성들의 불안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많은 필름 느와르에서 그러하듯이 정말로 위험한 팜므 파탈은 끝내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것, 이를 통해 남성들의 가부장적 권위를 회복시키려는 의도가 느와르에서 팜므 파탈의 또 다른 역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중 배상>에서 빌리 와일더가 그려낸 필리스를 팜므 파탈로 규정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어 보일 수 도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나는 이 점에 주목하려고 한다.

선형구조를 가진 범죄서사를 보면 사건의 발단 요인이 있고 사건 당사자가 추구하는 목적이 있기 마련이다. <이중 배상>에서 필리스의 목적은 남편을 죽여 자유를 얻고 보험금도 받아내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목숨을 끊는 게 나을 만큼 숨 막히는 공간과 남편’이 그녀를 추동한 원인이 될 것이다. 언뜻 보면 이해 가능해 보이지만 사실은 전적으로 필리스의 진술에 의존한, 네프의 녹음 내용일 뿐이다. 반면 네프는 매력적인 여인과 멋진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목적을 가졌으나 그가 필리스의 계획에 동조하게 되는 결정적 원인은 어디에서 나타나고 있지 않다. 쉽게 말해서 필리스의 환경이 비교적 자세히 설명되고 있는데 반해서 네프는 그저 문제없는 보험세일즈맨으로 나올 뿐이라는 점이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은 고치기 힘든 법이고 불치병이라는 단어로 통칭되기 마련이다. 네프는 원인 없는 목적에 사로잡혀 범죄를 저지르지만 사실 그는 필리스의 목적에 이용당함으로써 원인을 공유하는 처지에 놓이는 것이다. 따라서 오로지 그녀의 치명적 매력과 유혹 때문에 네프가 가담했다는 논리에 근거하여 비평가들은 그녀를 팜므 파탈로 규정해 버렸다. 하지만 그들의 논리에 순순히 따르는 것이 옳은 일인지 생각해 볼일이다.

「팜므 파탈」은 단어 그대로 해석하자면 '치명적 여자'를 뜻한다. 남성을 계획적 정략적으로 이용하여, 파멸로 이끌거나 남자의 인생 또는 나아가 국가의 존망까지도 위험하게 만드는 여자를 통칭하는 말이다. 때론 그 대상이 인류 전체를 향하기도 하는데 대표적 예가 원죄를 만들어낸 '이브' 라고 주장 하는 이도 있다. 다만 이들의 문제에 있어 남성의 책임은 어떻게 해결되어야 하는 것인가라는 점인데, 역사의 사실을 냉정히 살펴보면 남성중심의 역사에서 실제로 여자의 역할은 미미하기 짝이 없었다. 이는 고대국가나 21세기를 막론하고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남성사적 역사기술의 형태에 비추어 볼 때, 이들 팜므 파탈은 역사의 희생양이나, 남성이 맡아야 할 책임의 전가 대상으로 추락한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는 점이다. <이중 배상>에서 네프와 필리스가 처음 만나는 장면으로 돌아가자.

디드릭슨의 집을 방문한 네프가 처음 본 것은 선탠가운을 걸친 채 2층 발코니에 서 있던 필리스였고, 그녀가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네프의 시선은 줄곧 그녀의 발목을 주시하고 있다. 기어이 “정말 발찌가 아름답다”는 작업성 멘트를 시작으로 첫 대면에서부터 노골적인 시선과 추파를 던지며 상대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네프 쪽이었다. 첫 대면에서 필리스의 매력에 사로잡힌 네프가 집을 떠나면서 그녀와 나누는 대화를 살펴보자.

(필리스) “남편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았나요?”
(네 프) “처음에는 그랬는데, 이제는 생각이 좀 바뀌었죠”
(필리스) “이곳에는 시속 70킬로미터의 속도제한이 있어요”
(네 프) “경관님 제가 얼마로 달리고 있나요?”
(필리스) “140킬로 달리고 있어요”
(네 프) “그럼 어서 위반딱지를 떼어주세요?”
(필리스) “이번엔 경고만 하죠”
(네 프) “싫다면요?”
(필리스) “그럼 손을 비틀어야죠.”
(네 프) “울면서 어깨에 기대면요”
(필리스) “남편 어깨에 기대는 게 어때요.”


두 사람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끈적끈적하고 음기 가득한 대화를 통해 그들은 서로의 속내를 감추거나 엿보이면서 다음을 기약하고 있다. 그리고 예상대로 필리스가 네프의 집을 방문하면서 그녀의 계획은 현실로 드러나게 된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필리스의 의도대로 네프가 음모에 걸려든 형국이다. 하지만 첫 만남에서 필리스가 사고보험에 대해 물어보았음에도 “그때는 전혀 눈치 채지 못 했다” 는 네프의 진술을 믿는다 하더라도 그는 필리스의 유혹이 비집고 들어갈 여지를 처음부터 만들어놓고 있음이 발견된다. 즉 여성의 유혹이 시작되기 이전에 남성의 시선이 움직이며 그녀들을 바라보는 남자의 시각과 심리변화가 뚜렷하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남성에게 일어난 결과에만 포커스를 맞추고 여주인공을 팜므 파탈로 규정짓는다. 이러한 시도는 영화 내내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다니는 그림자와 그녀 위에 비추인 과도한 조명과 번들거리는 립스틱 위에 깔린 악의 기운을 카메라기법으로 재현되고 있다. 네프는 자신의 주장대로 흠 없이 잘 나가는 보험세일즈맨이었지만, 욕망에 사로잡힌 한 순간의 판단미스로 자신과 다른 이의 인생을 파멸로 이끈다. 그러므로 필리스가 팜므 파탈로 영화 속 사건의 단초를 제공한 여인이라면 그녀의 계획을 구체화하고 현실화시킨 네프의 행위는 오히려 범죄의 주체로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내내 그의 독백은 자신의 범죄행위를 뉘우친 다기 보다는 사건의 초점을 필리스에 맞추면서 자기변호에 급급해하는 내용을 담고 있고,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기운 역시 필리스의 악녀성에 희생당한 남자의 이야기를 느와르의 외피로 입혀 서둘려 마감해 버리는데 일조하고 있다. 이렇듯 실패한 역사의 책임을 나약한 여성에게 전가하려는 남자들의 무책임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남성들이 내제된 불온한 욕망과, 왜곡된 성적욕구를 제어 시키지 않는 한, 책임의 일부를 여자에게 떠넘기려는 시도가 계속 되는 한, 누구라도 자기만의 팜므 파탈을 스스로 만들게 될 것이라는 것, 어쩌면 <이중 배상>이 제시하는 또 다른 훈계일 수 도 있다.



거짓말 서스펜스
필리스의 사주로 디드릭슨을 살해하는데 성공한 네프는 예기치 않은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사건 당일 증인까지 염두에 둔 치밀한 알리바이를 만드는 데 성공하지만, 외부로는 디드릭슨의 딸 롤라에 대한 연민과 그녀의 입을 통해 들은 필리스의 요부기질을 확인하며 혼란에 빠지고, 내부로부터 조여 오는 키즈의 사건추리력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목적한 바를 달성한 후 아름다운 여인과의 위험천만한 재회를 꿈꾸는 네프에게 철저한 프로정신과 탁월한 직감을 지닌 키즈는 그들이 넘어야 할 마지막 관문인 셈이다. 이때부터 영화는 네프와 그의 상사이자 배상청구 심사담당인 키즈 사이에서 벌어지는 보험금청구를 둘러싼 심리적 충돌을 통해 새로운 재미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를테면 <이중 배상>의 후반부는 ‘거짓말 서스펜스’를 기제로 사용하면서 긴장감의 극대화를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짓말 서스펜스란 무엇인가. 쉬운 예로 설명을 하자.

학창시절 용돈을 벌충하는 방법으로 참고서나 급식비 등의 금액을 올리거나 아예 없는 용도를 만들어내어 부모님께 돈을 타낸 기억을 떠올리면 간단해 진다. 일단 목적하는 것을 손에 쥐긴 했으나 문제는 이때부터 벌어지는데, 혹시라도 참고서를 보자고 하지는 않을까. 영수증을 가져오라고 하지는 않을까. 혹은 부모님 사이의 대화에서 참고서나 급식비와 관련한 단어만 나와도 가슴 두근거림과 안절부절 못하던 그 심정. 바로 거짓말을 한 후 이것이 들통 날까봐 온통 촉수를 곤두세우고 예의주시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숨 막히는 긴장감을 일컬어 ‘거짓말 서스펜스’라고 칭한다. 하물며 매일 얼굴을 맞대야 하는 사이임에랴! 이 영화를 끌어가는 것은 보험회사 직원과 요부 사이에서 벌어지는 애정과 배신, 탐욕의 서사이지만 재미와 긴장감을 극대화시키면서 빼어난 느와르로 완성시켜주는 것은 거짓말 서스펜스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이중 배상>에서는 어떻게 거짓말 서스펜스를 차용하는가.

배상심사 담당자인 키즈 입장에서 보면 디드릭슨의 죽음은 기차에서 사고를 당했을 경우 보험금의 2배를 받게 되는 이중배상과 맞물린 중대 사안이다. 하지만 사망자가 사고사가 아닌 것으로 볼 수 없는 어떤 단서도 찾지 못하는 가운데서 키즈의 예리함은 빛을 발하게 된다. “이 큰 방을 차지하고 있다고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보험사 사장이 유추해낸 것이 고작 자살로 간주하는데 반해 키즈의 탁월한 능력은 이때부터 발휘된다. 사람의 심리를 쥐락펴락하면서 네프를 긴장하게 만드는 그는, 보험금지급 거부를 위해 자살을 확신하는 사장에게 “시속 16마일로 달리는 기차에서 자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 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내용의 소신발언으로 “키즈, 그때는 정말로 당신을 안아주고 싶었다”고 토로할 만큼 네프의 마음을 안도시키더니, 네프의 집에 찾아와서는 “우리가 놓친 것이 있었다. 디드릭슨이 다리를 다쳤는데, 왜 그때 보험금 청구를 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자신이 보험에 든 사실을 몰랐을 것”이라는 기막힌 추측으로 부인인 필리스 외에도 공범이 한 명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전달한다. 그러니 애써 긴장을 감추는 네프의 표정과 달리 신명나게 살인자의 머릿속을 파헤치는 키즈의 달변을 듣다 보면,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매일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상사의 서슬 퍼런 추리력 앞에 선 네프의 가슴 떨림이 어찌 와 닿지 않겠는가. 비록 이미 사건의 전모를 알고 있는 관객일지라도.



느와르에 스며든 기이한 낭만
<이중 배상>에는 필름 누아르의 어두운 그림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이한 낭만도 스며들어 있다. 디드릭슨의 집을 처음으로 방문한 네프가 필리스로부터 사고보험에 대한 질문을 받은 후 내뱉던 “살인에서도 때로는 허니 서클 향기가 난다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았겠는가?”라는 자조 섞인 대사가 그러하다. 게다가 변함없을 것이라 여겼던 두 사람의 애정이 무너지는 것은 네프가 디드릭슨의 전처 딸인 롤라를 만나게 되면서 부터인데, 아버지를 잃은 가련한 숙녀에게 연민을 느낌과 동시에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네프는 비정함과 거리가 먼 로맨티스트의 풍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반면 철두철미한 키즈의 경우 보험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심리를 파악하고 한 치의 오류도 범하지 않는 인물로 그려지지만 정작 가장 가까운 사람인 네프에게 마음을 들키고 자신의 믿음을 이용당하는 순진함마저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영화가 지닌 낭만의 정점은 뜻밖의 장면에서 발견 된다. 범죄사실을 녹음하던 자신을 오랫동안 지켜본 키즈의 등장으로 다시 한 번 실패한 네프가 그의 호감을 이용해 도주에 필요한 네 시간을 얻으려는 순간, “우린 그(책상 하나 사이)보다 더 가까웠”다는 키즈의 말에 화답하듯 네프의 마지막 일성(“나도 당신을 좋아해요”)의 야릇한 뉘앙스를 빌어 범죄자의 파국마저도 남자들의 우정을 넘어선 애틋함으로 덮어버리는 방식이 그러하다. 그리하여 국경을 넘는 데 필요한 네 시간을 달라는 네프를 향해 “자네는 거기까지 가지 못 할 걸세. 엘리베이터까지도 갈 수 없을”거라 말하던 키즈의 안타까운 눈빛과 더불어 영화는 마침표를 찍는다.


나가면서
미국의 근간을 이루는 이념은 두 말 할 나위 없이 개척정신과 청교도정신이다. 할리우드가 탄생한 이래 미국 영화는 이 두 개의 정신을 고수하고 유지하면서 발전해왔다. 특히 양차 대전 기간 동안 할리우드 영화는 자국민들에겐 애국심의 고취를 통해 보수적 이데올로기를 설파했고 유럽 각국에 터전을 세우면서 미국적 가치관과 미국적 삶의 환상을 심어놓기 이른다. 미국의 질서는 곧 세계의 질서를 의미하기도 했다. 이러한 질서를 위반하지만 않는다면, 합리적 생활양식에 의거하여 노력하기만 하면 누구나 그 질서 내에서 성공을 보장받았다.  아메리칸 드림의 최대 수혜자는 갱들과 유럽에서 온 이민자들이었다. 달리 말하면 양차 대전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유럽감독들에 의해 미국의 필름느와르가 형성된 반면 이들이 만들어낸 영화로 인해 미국적 가치관이 전복 위기를 맞이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느와르의 세계는 미국의 개척정신이 뒤집힌 세계이다. 갱은 저명인사가 돼 거들먹거리고 사립탐정은 역겨워서 경찰을 때려 친 사람이며 젊은 여성은 속는 것이 지겨워서 남들을 속이려고 든다. <이중 배상>의 주인공 네프는 외적으로는 문제가 없는 사내로 보이지만, 한 순간 사랑에 눈이 멀어 유혹의 덫을 피하지 못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배상청구업무를 권하는 키즈의 요청을 거절함으로써 보다 나은 미래를 포기하거니와 금욕과 절제, 신앙이 덕목인 청교도 정신을 철저히 위배함으로써 자신을 파멸로 이끌고 있다. 이에 반해 키즈는 결혼도 미룬 채 일중독에 빠진 철두철미한 근대자본주의자의 상징적 인물이다. 주머니에 불이 날까봐 성냥을 갖고 다니지 않는 신경증적 성향도 그렇지만 마지막까지 이성적 판단으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면서 네프를 병원과 경찰에 인계하려 장면에서 그의 특성은 극대화 된다. 키즈가 미국의 정신을 고스란히 이어가는 인물이라면 네프는 이를 뒤집는 사람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둘 사이에 끼어든 필리스는 양자 모두에게 위협적 존재인 셈이다. 남편의 전처를 살해한 혐의를 안고 있는 그녀가 또다시 남편의 살인을 계획하고 사주함으로써, 가정의 몰락을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의 막바지 미국의 모든 산업은 군수제품의 생산과 보급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자동차 유류의 배급제 시행에서 알 수 있듯이 전쟁을 치루는 데 있어 기름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때문에 네프가 죽인 필리스의 남편 디드릭슨이 정유공장의 사장이었다는 점은 다분히 상징적이다. 요컨대 미국의 정신이 결여된 나약한 한 남자가 가정을 해체하고 가부장적 권위에 도전하려는 요부의 꼬임에 빠져 사적이익을 도모하는, 미국의 보수적 이데올로기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행위에 대하여, 미국적 가치관을 지켜내려는 할리우드 정신이 빚어낸 영화가 <이중 배상>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럼에도 빌리 와일더는 네프를 죽음으로까지 내몰지 않는다. 왜 그랬을까?



이로써 빌리 와일더 시리즈의 두 번째 이야기가 끝이 났다.
<이중 배상>은 필름느와르치고는 상당히 귀엽고 즐거운 작품이다. 어둠의 기운이 서린 느와르를 두고 무슨 얘기냐고 할 수 있겠으나 앞서 거론한 대로 캐릭터들의 모습이 악인(네프와 필리스)이라고 하기엔 너무 어설프기 그지없다. 반면에 그들을 추적하는 선인(키즈)은 너무 완벽하다. 모든 것을 갖춘 완벽한 자가 어설픈 범죄자를 쫓는 형국이다. 빌리 와일더는 느와르에서마저 희화화된 인물구도를 통해 미국사회의 신경증적 불안감을 주시한다. 앞선 <선셋 대로>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는 꼭 보기를 권한다. 다음 이야기는 <잃어버린 주말>에 대한 것이다. 알콜중독자의 주말을 그린 이 영화에서 우리는 (아마도)영화 사상 최악의 알콜중독자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계획대로라면 빌리 와일더 시리즈는 금년 안에 끝을 맺어야 하는데, 아마도 2007년 1월까지 이어질 것 같고, 추가로 <제 17 포로수용소>까지 넣어서 마무리 지을 생각이다.
2006.12.07
백건영(영화평론가)
편집장

by 달의궁전 | 2007/10/09 10:24 | 네오이마주 | 트랙백 | 덧글(0)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